<제 19회>
9.28수복의 역사적인 배경, 그 기록에는 우선 인민군이 10개 사단의 병력을 투입하고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감행하여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남으로, 남으로 공격해 가는 와중에 UN안전보장이사회가 북에 대한 군사 제재를 결정했고 유엔군의 파견이 이루어졌다.
수세에 몰리다 공격을 개시한 것은 낙동강 전선에서의 일이었고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작전에는 한국 15척, 미국 226척, 영국 12척, 캐나다 13척, 호주 2척, 뉴질랜드 2척, 프랑스 1척, 참전 16개국 217척의 함정과 한국육군보병 제 17연대, 해병 2개 대대, 미국 육군보병 제 7사단과 해병 제 1사단, 영국 해병대등으로 구성된 미 제 10군단이 참가했다. 그리고 항공모함 함재기의 서해안일대 폭격을 9월 12일부터, 13일에는 인천 함포사격이 개시, 15일에 첨병부대가 월미도에 상륙 28분만에 점령, 주력부대역시 1시간만에 인천을 장악했다. 이어서 진격, 김포비행장을 확보하고 인민군 최후의 방어선 접전지인 연희고지에서 필사적인 인민군의 저항에도 서울을 함락했다. 한편에서는 남산과 왕십리 방면을 제압하고 망우리 일대를 탈환하는등 3면에서 진격하여 27일에 국군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계양, 28일, 서울은 수복된 것이었다. 이 와중에 서울의 도처는 폭격에 불바다로 화했고 우리집도 이때 폭격으로 전소되었다. 그 밤, 나는 숱케이스를 꽉 붙들고 아버지의 명령만을 기다렸다. 이 가방 한개만을 들고 뛰어나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방속에는 외삼촌에게 쓴 편지들, 일기장, 작문집과 사진, 책, 가장 아끼던 인형까지 가방에 넣을 수 있는 한 내가 귀중히 여기던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꼬마 식모는 인성이를 단단히 묶어 업고 있었고, 우리는 아버지의 명령과 함께 뛰쳐나갈, 그리고 살아남기를 애처롭게 염원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운명에 맡기고 각자 흩어져 나가야 한다. 그리고…, 폭격이 끝나면…, 살아 있으면…, 이 집터에서 만나자.”
3개월만에 방으로 올라 온 아버지의 목소리는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비장함이 우리 모두를 짓눌렀다. 폭격소리와 창밖을 화염으로 무늬를 이루는 불길은 아버지의 비장한 목소리위에 무게를 얹기까지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부축하고 있었고 현성이는 몸까지 공포에 젖어 있었다. 영겁의 시간 같았던 그 순간들, 폭격소리는 더 가까이, 창밖의 화염은 더 강렬히, 그리고 우리 뒷집에 떨어졌다.
“지금 나가라! 뿔뿔이 흩어져라! 나가라!”
그때였다. 뛰어나가는 꼬마 식모를 내가 붙들었다. 그리고 인성이를 받아 내 등으로 옮기고 가방을 팽개친채 쌀자루를 머리에 이고 집을 뛰쳐나왔다. 생과 사의 기로. 그 기로에서는 평소에 인간이 생각하는 것도, 나약함도 일순간에 기적과도 같은 상황이 일어남을 그때 알았다. 처음으로 등에 동생을 업고 쌀자루를 머리에 얹힌 채 나는 뛰고 또 뛰었다. 얼마를 뛰다가 뒤를 돌아보니 우리집이 불길에 쌓여 있었다. 아버지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각자만 생각하며 살아있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돌아선 채 그 자리에 서서 타고 있을 가방을 생각하며 울기 시작했다. 소금 기둥은 되지 않았지만 소금물 같은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신기하게도 가족의 죽음은 절대로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고, 타는 것은 내 가방뿐이라고 여겨졌다. 집이 타는데도 집에 대한 걱정도 되지 않았다. 집은 또 있을 것 같았고 내 가방 속의 물건만 재로 변하고 있다는. 누나가 울자 등에서 동생도 자즈러지게 울었다. 그 곳까지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우리 남매의 울음 소리에 자신들이 위험하니 떠나라고 했다. 쫓기는 인민군에게 울음소리는 소위 죽음을 부르는 신호라는 것이었다. 나는 울음을 그칠 수가 없어 그 자리를 떠나면서 계속 울었다. 뛸 힘도, 걸을 힘도 잃고 기면서 한발한발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나 기었을까, 무엇인가 나의 발을 멈추게 했다. 땅 밑으로 푹꺼진 위로 뻗어나온 나무뿌리, 커다란 고목나무 앞이었다.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는 곳에 고목나무 한 그루가 기고 있는 나를 멈추게 했다. 나는 꺼진 땅에 쌀자루부터 넣고 그 위로 동생과 함께 들어갔다. 그리고 여기저기 뻗어있는 뿌리를 긁어모아 우리를 덮어버렸다. 천혜의 피난처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그 안에서 잠이 들었는지 의식을 잃었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눈을 떳을 때는 덮여진 뿌리사이로 짙은 안개같은 연기가 천지를 가리고 있었다. 폭격소리도 불길도 보이지 않았다. 뿌리를 헤치고 나와보니 하나 둘 물체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인성이는 지쳐서 울지도 못하고 내등에 처져 숨소리만 흘렸다.
쌀자루까지 머리에 이고 주저앉을 것만 같은 몸을 이끌고 집터를 향해 되돌아 걷던 그 길고도 긴 여정. 그 여정의 길은 시체로 덮여있었다. 우리보고 떠나라고 했던 사람들은 무더기로, 그 곳을 시체로 지키고 있었다. 울음소리에 들킬것을 염려했던 그들은 무슨 소리에 죽음을 당한 것일까.
나는 집터 근처에서 가족을 찾기 시작했다. 뿌연 연기가 아직도, 그야말로 피어오르는 사이로 울고 있는 꼬마가 보였다. 직감으로 현성이임을 알았다. 현성이의 울음소리, 힘이 다 빠진 울음소리였지만 그 소리는 살아 있는 자의 신호였다. 생명을 알라는 소리였다. 나는 뛰었다.
“누나!”
나를 보고 달려오는 현성이의 울음소리가 점점 힘을 발했다. 나의 몸에도 힘이 용솟음쳤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생명을 외쳤다. 생존을 위해 외치던 ‘차고 달고 시원한 얼음 냉차 사세요’ 보다 더 크게, 생존을 넘은 생명을 위하여 더 힘있게, 더 크게 울었다. 실로 현성이와 내가 마주잡고 운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고 마지막이었다. 이제는 쌀자루도 무겁지 않고 등에 업혀있는 인성이도 무겁지 않았다. 남은 손으로 현성이를 힘있게 붙들고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꼬마식모를 찾아나갔다. 그리고 시체와 부상자의 신음소리가 엉켜있는 사이사이에서 가족 모두를 찾았다.
손끝 하나 다치지 않은 상태로 모두 살아 있었다. 영등포에 놀러간 지성이도 사촌들과 함께 예산으로 내려갔을 것을 나는 또한 확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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