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회
집안에서 표현되는 아름다움에는 하다못해 시장 바닥에서 빈대떡을 부치고 있는 초라한 아주머니가 애 젖먹이는 모습, 엿장수가 가위를 흔드는 모습, 어미소와 새끼소를 팔러 나온 농군의 모습 등 이 세상에는 도무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는 것 같았다. 특히 나의 뇌리에 각인된 강력한 장면중 하나는 해방이 되던날, 둘째 외삼촌이 이마에 흰띠를 두르고 태극기를 흔들며 단상에서 만세를 선창할때, 우리 가족들은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감격적이라며 통곡까지 했었던 일이었다. 이렇게 아름답다라는 말의 홍수속에서 자란 나는 훗날 정신 세계를 윤택하게도 했지만 많은 상처를 안기도 했다.
외삼촌의 아들 기정이가 침대에 누워있었다. 나는 외삼촌이 내게 그랬듯이 기정이를 안았다.
“아빠도 엄마도 못 알아 보는것 같은데 너만 보면 애가 방긋방긋 웃는게 신기하기도 하다.”
기정이는 동화속의 아기 왕자와 같았다.
“외삼촌이 안계셔도 자고 갈래?”
“기정이 하고 자고 싶어.”
나는 왕자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외삼촌의 첼로 연주가 방안에 감돌았다. 트로이메라이의 진정으로 아름다운 선율이. 세계 명작 동화를 읽어주던 외삼촌의 목소리가 그 음악을 타고 나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나의 혜성아, 정거장에서 손을 흔들며 서 있던 너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가물거린다. 도토리만한 꼬맹이 공주님이 슬퍼하던 모습. 하지만 혜성아, 소설가가 되려면 이별의 아픔을 경험하는 것도 괜찮다. 아픔까지도 자양분이 되니 소설가는 축복받은 삶이 아니겠니? 너는 그저 계속 공부 잘하고, 일기와 작문도 열심히 쓰고, 그리고 삼촌이 보내는 책들을 읽으며 편지를 해라. 외삼촌과의 약속이다. 너는 왜 첼로도 그만두고 네 옆을 떠나 육군사관학교냐고 물었지만 네가 조금만 더 크면 말해 줄거다. 그리고 너도 다음에 좁은 예산읍이 아닌, 서울도 아닌, 미국등 세계속으로 떠나야한다. 예산에 있는 동안 추억 만들기나 계속해라. 고향의 추억들은 훗날에 위안과 즐거움이 될 것이다.
그럼 다음 편지 보낼때까지 잘 있거라.
- 혜성이 외삼촌 -
편지와 함께 도착한 첫번째 책은 <쌍무지개가 뜨는 언덕>이었다. 외삼촌의 편지를 받은 후 나는 외삼촌의 다음 편지와 만날날을 기다리며 친구들과 추억 만들기에 박차를 가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예산은 극히도 작은읍과 주변이었지만 우리들에게는 하나의 세계였다. 나는 애들을 끌고 꼬마들의 세계에서는 참으로 아득하고 멀게 여겨지는 공동묘지까지도 종종갔다. 놀랍게도 무덤은 두려움이 아닌 고요였다. 누가 죽으면 슬프고 무서웠지만 공동묘지는 평온이 깃들고 있었다. 우리는 죽어서도 한곳에 묻히자고 했다. 흙으로 돌아갈때까지의 길고 긴 인생여정. 우리는 아무것도 예측할 능력이 없는 어린이들이었다. 더구나 어른들의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종횡무진한 삶을 가늠할 수 없는, 그저 즐거운 어린이들이었다. 뿐만아니라 모든면에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삶의 어두운 측면을 상상할 수 없이 자랐다. 물론 생각과 마음도 비슷했다. 한가지 나의 특이하게 다른 점은 이 애들은 모두 양순했다. 나만 가끔 악바리 짓을 했다. 하지만 이 유난한 악바리 짓으로 인해 일찌기 세계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풍부한 추억을 안으며 일생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추억을 반추하는 것만으로도 그때 그때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삶의 벽에 부딛칠때만다 이겨내게 하는 힘이 되었다. 추억은 우리들 삶을 지켜주는 병풍이기도 했다. 추억을 만들때는 절대로 알 수 없었던 삶의 여정. 예산에서 서울로, 그리고 미국으로 유학을 오면서 겪은 일생, 그래도 삶이 아름답다는 결론을 내린 우리에게 추억이 절대적인 한몫을 한 것이다.
외삼촌과 나와의 두번에 걸친 이별 말고도 어린 날의 추억속에 슬픔이 있었다면 6.25 전쟁을 예측 못한 삶의 한가운데에서 우리집이 서울로 이사했던 것 역시 이별의 슬픔이었다. 외삼촌과의 이별을 겪었던 나였기에, 또한 떠나는 쪽이 나였기에 그 슬픔은 남는 친구들이 더 컷었지만 그래도, 우리가 함께 겪은 것이었다. 그후에도 이 애들과 나 사이에서 언제나 내가 먼저 떠났기 때문에 우리의 추억 가운데는 친구들이 조금은 더 아파야 했었다. 1.4 후퇴때 내가 동생의 손을 잡고 예산으로, 그야말로 입성했을때 이 애들의 환성과 기쁨은 전쟁이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때 내가 겪은 6.25는 이 애들의 되풀이되는 물음에 수백번도 더 해주어야 했다.
“어떻게 전쟁터에서 네가, 네가 말이다, 냉차장사와 참외장사를 할수가 있었니?”
“포탄 속에서 시체를 넘어?”
비록 한달간의 냉차 장사에 두 주일의 참외 장사였지만 나와 동생은 전쟁터에서 살아 남았다. 이 기간 나는 가장이었고 동생은 가장인 누나를 도와 함께 남대문 시장으로, 뚝섬으로, 얼음을 사려고 참외를 사려고 포탄속을 뛰어다녔다. 냉차가 많이 팔리는 날엔 얼음이 부족해서 동생 혼자 사러가기도 했는데 그때의 심정을 동생은 지금까지 동생의 친구들에게 토로하고 있을 정도다.
“얼음을 사들고 오다가 폭격을 당하면 피해있어야 했는데, 얼음이 녹아 물이 한방울 한방을 떨어질때마다 내 피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악바리 누나가 야단칠까봐서…”
내가 악바리 노릇을 했기때문에 우리 가족이 살아남았음을. 더구나 비싼 모찌도 수시로 내가 사주었다. 모찌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동생이 얼음을 혼자 사올때마다 모찌를 사주었다. ‘차고 달고 시원한 얼음 냉차 사세요!’하고 외치라하면 울기만하던 동생이다. 동생은 귀부인같이 생긴 아줌마가 귀부인같이 만들어놓고 파는 모찌만 쳐다보며 그 모찌를 사달라고 울었다. 냉차를 크게 외치면 사주겠다고 달래도 입안에서만 냉차 소리를 내며 울기만했다. 결국 나 혼자서 냉차 소리를 종일 외쳐대야했다. 그리고 동생은 얼음이나 사오는 심부름을 하고 모찌를 먹었다. 그 모찌는 냉차를 팔기 위해 외쳐대는 누나의 절규인지도 모르고 동생은 지금까지 누나를 원망하고 있는 것이다.
염천교 다리위에서 ‘차고 달고 시원한 얼음 냉차 사세요’를 외쳐댔던 전쟁. 그 여름은 몸도 마음도 유난히 더웠지만 나의 외침에 날개를 달아 냉차장사는 번창했고 그 수입으로 추석잔치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해 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도 다가올 설날까지를 위해 더위가 물러나자 참외장사로 돌입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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