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우리의 추억 만들기와 세계속 여정의 전초전은 예산의 읍내는 물론이고 근교를 누비는 것으로 지칠줄 모르게 이어졌다. 무한천으로 흐르는 개천을 걸으면서 박정민은 사진을 찍었고, 화가로 전향시켰지만 김재훈은 ‘푸른 하늘 은하수’, ‘낮에 나온 반달’ 등을 불렀고 지연희는 뱅글뱅글돌며 발레리나의 흉내를 냈다. 그리고 윤지수는 너무나 급하게 걸어서 항상 넘어지는 내 무릎에 약을 발라주는 것이 일이었다. 일종의 내 주치의 역할을 했다.
예산은 우리의 오늘을 만들어 낸 초석이었다. 우리는 사직골을 따라 과수원으로, 호수가로 종횡무진하게 돌아다니며 꿈을 키웠으니까. 금오산에도 올라갔다가 읍내 본정통과 시장도 누볐다. 마음이 내키지 않아하는 애들을 끌고, 향천사의 절에 올라가 우리들의 펼쳐질 인생의 청사진을 놓고 부처님앞에 수도 없이 절을 했다. 뿐만 아니라 충남여객의 뻐스를 타고 마곡사로 칠갑산으로도 가고 수덕사도 갔다. 절 곳곳을 다니며 나와 친구들의 미래를 부처님께 빌고 빌었다. 이 애들은 할 수 없이 절까지는 따라왔지만 절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 애들과 내가 행동을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은 절에서도 교회와 마찬가지였다.
“나는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교회안에서 성극을 너희들과 함께 하는데 너희들은 왜 그러니?”
내가 물으면 그것하나만 봐달라고 했다. 태중에 있을때부터 교회를 다니던 애들이었다. 착하고 아름다운 나의 친구들은 내 비위를 다 맞추어 주었지만 부처님한테 절하는 것 하나만은 시키지 말아달라고 했다. 교인이 아닌 내가 성극 연습을 할때 기도 시간에 고개를 숙이는데 너희들은 왜 못하느냐고 물으면 납득이 갈만한 대답을 하지 못한채 그저 그렇게 해 달라고 했다. 물론 내가 교회안에서 모두를 따라 눈을 감는 기도 시간은 연극 연습때인 부활절과 크리스마스뿐이었다. 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아야 하는지를 모르는채였다. 이 애들이 내가 함께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교회 출석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님이 이해되지가 않았다. 절대자란분이 너무나 무기력해 보였다. 찬송을 부르는 교인들 역시 슬픔에 젖어 처져 있었고 표정도 애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절의 내부는 호화로우면서도 장엄했다. 부처님 또한 위엄과 자비가 넘쳤다. 무엇이나 이루어 줄것같은 든든함과 믿음이 있었다. 물론 세상을 만든 어떤 창조자가 있을 거라고는 믿었다. 우리집 정원과 외가, 친가를 둘러싼 온갖 과일나무와 꽃들을 보아도 그랬다. 어느 절대자의 솜씨가 아니면 불가능할 것 같은 아름다움이 도처에서 나를 취하게 했으니까. 온갖 새와 그들의 웃음인지, 울음인지, 혹은 대화인지 모르는 소리도 그랬고, 무한천을 향해서 흐르는 개울물 소리도 그랬다. 특히 정원의 탱자나무, 은행나무 위로 펼쳐진 밤하늘의 별들은 그 신비로움에 황홀했다. 눈도, 비도, 더구나 무지개를 보면 경이로움에 몸이 굳어질 듯 했다. 사계절마다 바뀌는 찬란한 자연의 변화에 감탄을 하기도 했다.
“하나님이 창조자시면 교회에 나가겠는데 예수님이 이해가 안된다니까.”
친구들이 소위 전도할때면 내 대답은 이랬다. 나는 몇번의 성극에서 언제나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는 내 또래의 애들보다는 성경을 조금은 더 알려고 노력은 했다. 예산역을 떠날수 밖에 없었던 날 연습해야 하는 성극은 다윗왕과 우리아 장군, 그리고 밧세바가 등장하는 세계였다. 나는 꼬마 계집애임에도 다윗왕이었다.
“성경은 소설같다.”
나는 연극을 하면서 자꾸만 성경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사람이 쓰는 것이지만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라니까.”
애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나님’을 강조했다. 이런 대화는 그후로도 수십년간 이어졌으니 나라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는 참으로 긴긴 사연이 쌓여갔다.
외삼촌이 떠나던 날도 역에 나를 데리러온 애들은 하나같이 기도 이야기를 했다.
“너의 외삼촌을 빨리 만나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기도할께.”
“예수님은 애들의 기도는 더 잘 들어 주신데.”
“그래, 기도하면 너의 외삼촌이 너를 만나려고 곧 기차타고 내려 오실거야.”
“맞아, 기도하면 돼.”
그리고는 내가 이제라도 교회에 다니면서 기도하면 외삼촌 만나는 날이 더 빨라질 거라고들 했다.
“벌써 외삼촌 생각이 나서 왔니?”
외숙모가 반기며 나를 끌어안았다. 그날 교회의 연극 연습이 끝나자 나의 발길은 집과는 반대 방향인 외삼촌의 서재로 갔다. 2년간 줄기차게 드나들던 서재였다. 이 서재는 외삼촌이 결혼하기 전까지는 외삼촌의 침실이기도 했다. 나는 외삼촌의 침대에서 외삼촌이 연주하는 첼로도 듣고, 외삼촌으로부터 세계를 그리며 꿈을 키웠다. 해방 후 한글을 자유롭게 쓰기 시작하면서 쓴 나의 첫번째 작문이 장원을 하던 그 밤부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 사랑속에서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으로 자라던 나의 의기는 그야말로 양양하였다. 모두들 얼마나 나에게 빠져 있었으면 훗날 결혼을 하고 자신들의 자식이 태어났는데도 나에 대한 첫사랑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고들 했다.
“누나, 내가 책임지고 우리 혜성이를 작가로 키울께.”
양가의 가족들이 다 모여 나의 수상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둘째 외삼촌이 말했다.
“가경이 너 뿐이겠니? 이모들까지 소설속에 파묻혀 살고 있으니 우리 혜성이의 몸엔 이미 작가의 피가 흐르고 있을게다.”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축하연을 즐기고 있는 나를 보며 어머니가 말했다. 사실 나는 이모들이 소설책에 빠져 훌쩍울쩍 우는 모습을 많이도 보았다.
“그렇게 슬픈 책들을 왜 읽고 그래?”
내가 물으면 아름다워서 운다고 했다. 확실히 그때의 모든 현상들이 나에게 영향을 끼쳐 평생을 따라다녔다. 침실에 서재를 겸하는 거며, 아름다울때 더 눈물이 나는 것등이 그랬다. 아뭏든 나의 기억속 우리 집안 식구들은 아름답다는 말을 제일 많이 했다. 하다못해 추수가 끝난 가을 벌판의 황량함도 아름답다고 했고, 초겨울에 이그러져 짓밟히는 낙엽들도 아름답다고 했다. 호박꽃도 할미꽃도 아름답고, 튀긴 메뚜기와 번데기까지도 아름답다며 먹었다. 어린 나는 외부적인 형태만 보았지만 이 모든 현상들을 예술적으로, 철학적으로 승화시키기도 하고, 상징적인 모습으로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삶에 연결시킬 능력이 없었지만 서서히 물들어가며 슬픈것도, 아픈것도 아름다운 지경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