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훈 기자
우리 집에는 LP가 약 2천여장 남짓 소장되어 있다. 엄밀히 세어보면 2천5백장 정도될까? 그 중에는 와이프와 피 튀기는(?) 전투 끝에 차곡히 모은… 정말 피 같은 LP가 있는가 하면, 갖다 버리겠다는 친구로부터 무상으로 얻어온 것도 있다. 25년 가까이 모아왔으니까 일년에 약 1백장 정도의 LP를 모아온 셈이다.
10여년 전만해도 LP를 1천장 이상 소장하고 있다고 하면 웬만한 자랑거리였는데 요즘 CD 시대를 맞아 LD는 거의 골동품 취급 되고 있다. LP에 대한 애착은 몇몇 특별한 사람들을 제외하곤 찾아보기 힘들다. 또 LP를 많이 소장하고 있다고 해서 특별한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소리의 질도 그렇거니와 플레이(재생)하기도 불편하고, 특별히 LP를 고집해야할 이유가 없어졌다. 혹자는 LP 만이 보유한 (아날로그)소리가 CD가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따스하다고 주장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좋은 음향기기로 플레이하는 CD 소리는 거의 원음에 가깝다.
LP를 선호하는 이유는 아마 다른데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너덜너덜해진 LP의 디스크 쟈켓에서 묻어 나오는 어떤 인간적인 때… 향수 때문은 아닐까. 옛 것을 지키고 싶은… 고루한 고집 때문만은 아닌, LP에는 LP만의 고유한 체취가 있다. 칙칙거리는 잡음에서부터 이건 너무도 맑고 고요하여 마치 로보트를 위한 음악 같은 CD와는 구별된다. 텐테이블의 톤암이 지긋이 눌러주는 무게도 천편일률적인 CD와는 차이가 있다. 굳이 따지자면 마음 속에 전달되는 소리…, 따스하고 인간적인… 고향 같은 맛…, 이러한 것이 아닐까.
LP가 주는 따스한 인간적인 맛과 가장 어울리는 음악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LP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작품으로 드보르작의 음악들을 꼽고 싶다. 그중 ‘신세계’ 교향곡 같은 곡은 CD로 듣는다고해서 별로 틀려질 것이 없겠지만 현악 4중주 <아메리카>와 같은 곡을 LP로 듣는 맛은 경험해 본 사람이 아니면 모른다. 현의 따스한 맛을 향수의 감정으로 연결시키는 데 있어서 드보르작과 같은 천재도 없었다. 드보르작은 원래 기차광으로도 불리울 만큼 늘 기차를 타고 먼 여행을 연상했던, 방랑의 감수성을 가진 작곡가였다. 그의 교향곡(신세계)을 들어보면 기차에 대해 어떤 호기심, 방랑의 노스탤지어가 짙게 풍겨져 오고 있는데 이같은 정서는 드보르작이 미국에서 탄생시킨 ‘신세계(교향곡)’, ‘아메리카 4중주(F 장조)’같은 위대한 작품이 탄생하게 된 원동력이 됐다. 드보르작은 51세 때 뉴욕 국민 음악원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신세계 교향곡’, ‘첼로 협주곡’, ‘아메리카 현악 4중주’ 등 3대 명작을 남겼는데 이중 ‘현악 4중주’는 가장 미국적인 곡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일명 ‘아메리카’ 혹은 ‘니그로(Nigger)’라고도 불리 울만큼 흑인 영가의 짙은 영향력을 엿 볼 수 있는 곡이다. 이곡은 단조로우면서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선율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2악장(렌토)의 감미로운 선율은 ‘신세계’의 2악장(꿈속의 고향)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악장으로 꼽히는 곡이다. 마치 가을을 연상하며 듣기에 어울리는 곡이라고나 할까. 시골의 반딧불 혹은 고추잠자리를 연상하며 들으면 알맞을 만큼 가슴 따스하게 벅차오르는 곡이다.
아메리카 현악 4중주는 귀에 번쩍 들 만큼 그렇게 감미로운 곡도 또 대단한 예술성을 표현하고 있는 곡도 아니다. 언듯 들으면 다소 동양적이라고나 할까, 어딘가 정적이면서도 내면으로 깊이 감싸드는 곡이다. 파격적이며 미래지향적이라기 보다는 다소 내성적이고 과거지향적인 향수가 느껴지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곡이 단조롭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젖어들 수 있는 반면 큰 격정으로 휘몰아치는 곡도 아니다. 다만 이 곡을 들으면서 마음속의 고향을 연상케 만드는 것이 독특하다고 하겠는데 매우 평온한 안식으로 젖어들게 만드는 묘미가 있는 곡이다. 마치 박목월의 시 ‘구름에 달가 듯이’를 연상시킨다고나할까…. 나그네의 쓸쓸함이… 전원적인 풍요로움이 동시에 느껴져 오는 곡으로서, 마치 해질 녘 시골아이들이 잠자리채를 메고 평화롭게 걷고 있는 정경같다.
가을은 방랑의 계절이자 향수의 계절이다. 봄의 활기, 분주한 여름이 지나고 낙엽의 가을이 되면 사람들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때로는 먼 여행을 생각하고 때로는 향수로 짙게 가라앉기도 한다. 육체의 고단한 날개를 접고 영혼을 생각하는 계절…. 산다는 것은 이성(인식)일까, 영혼(마음)일까? 한갓 참새들도 저렇게 평화롭게 하늘을 나는데 인간 사는 것에는 왜 이처럼 많은 문제를 넘어야 하는 지… 시름을 접어두고 드보르작의 아메리카 현악 4중주 2악장 ‘렌토’의 따스한 고향의 소리에 젖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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