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삶
▶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바둑판처럼 포장된 모뉴먼트 거리는 바쁜 시내 한복판인데도 조용하기만 했다. 비뚤비뚤 자란 가로수가 아침 햇살을 가리고 있었다. 현은 머리를 숙이고 걸었다. 가느다란 햇빛을 피하기라도 하듯. 수십 년 묵은 집들이 이 고독한 이방인을 지켜보듯 거만하게 서있었다. 현은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조금만 가면 대학교가 나오고 좌우편으로 조그만 상가가 나온다. 제일 변두리에 주먹만한 상점이 바로 현이 10년을 지켜온 구둣방이다. 현은 서둘러 문을 열었다. 도시가 주는 중압감을 얼른 헤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문을 열자 비린 가죽 냄새와 접착제가 풍기는 야릇한 향기가 현의 소침한 기분을 덜어주었다. 벽 가운데는 시계대신 낡은 바이올린 케이스가 비스듬히 달려있었다. 현은 여느 때처럼 PBS 라디오를 틀었다. 아이잭 펄만이 연주하는 크라이스러의 사랑의 연미곡이 흘러나왔다. 현은 눈을 감았다. 곧 이어 드볼작의 수러박 춤이 옛 영화 모래시계의 주제곡과 흡사하여서 현의 마음을 저리게 했다.
문이 갑자기 열리고 훤칠한 키에 보타이를 한 노신사가 들어섰다. 손에는 검정구두를 들고 있었다. 구두에 박힌 수정구슬들이 아침햇살을 반사해서 현을 눈부시게 했다. 어디서 일전에 본 듯도 싶은 그 신사는 또렷한 한국말로 뒷굽을 접착해달라고 말하며 신기한 듯이 벽에 걸린 바이올린 케이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윗 주머니에서 자기 명함과 음악회 초대권 두 장을 구두와 함께 현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인사도 없이 나갔다.
현의 대학 졸업을 며칠 앞두고 숙이 전화를 했다. 중요한 일이라 했다. 현은 숙이 나오라는 다방에 갔다. 숙이 오랜만에 정장을 하고 왔다. 하늘색 투피스에 구슬들이 달린 까만 구두를 신고 있었다. 왠지 빤짝이는 구슬들이 현을 슬프게 했다. 원래 하얀 숙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져 있었다. 숙은 얼굴을 들지 안은 채로 속삭였다. 신랑 될 사람이 미국에서 왔다고 했다. 그리고 현을 바라봤다. 숙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모레시계 주제곡이 다방 안을 가득 채웠다. 현은 일어섰다. 그리고 뒤를 보지 않고 걸었다. 문가에선 멋진 보타이를 한 키 큰 청년 옆을 지났다. 그 청년은 현에게 미소를 짖고 있었다.
현은 자원해서 월남에 갔다. 전쟁터에까지 숙이 가르쳐준 바이올린을 끼고 갔다. 뉴욕으로 이민 와서 생선가게에서 일을 하면서도 바이올린을 켰다. 직장을 잃고 길거리에서 유숙하면서도 바이올린을 키며 베고 잤다. 현의 솜씨를 귀히 여긴 사람들이 술집, 음식점에 바이올린을 키는 일자리를 주어도 현은 단호히 거절했다.
뉴욕서 필리로 가는 전철에서 현은 낡은 바이올린 케이스 위에 손을 놓고 차이코프스키의 멜로디를 틀고 있었다. 옆에 앉은 할아버지가 Op.42 #3 라고 속삭였다. 흰 수염이 턱까지 닫는 그는 현을 돕고 싶어했다. 그가 바로 구둣방을 물려준 옛 주인이었다. 현은 그가 메인으로 은퇴해갈 때 자기의 모든 것을 그처럼 주고 싶었다. 그렇지 이젠 틀지 않아도 귀에 들려오는 그 소리. 그는 바이올린을 보냈다.
노신사가 3일째 구슬구두를 찾아갔다. 석 달이 지났을까. 까만 보타이를 맨 그가 문을 들어서자마자 모자를 벗고 현에게 눈인사를 했다. 제 아내가 구두가 옛 모습 그대로 되었다고 감사를 전합니다 라며 머뭇거리더니, 음악회에 꼭 오실 줄 알았는데. 제 아내는 음악회를 끝내고 오랜 아픔을 잊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곱게 선물용지에 쌓인 바이올린을 꺼냈다. 아내가, 이것을 댁에게 드리라고 전합디다. 받아 주십시오. 그는 머뭇거리더니 뒷걸음으로 문을 열고 나갔다. 현은 벽에 걸린 바이올린 케이스를 바라봤다. 그의 귓전에 모래시계의 주제곡이 들려왔다.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