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한국문협·본보 주최 제3회 백일장 학생부 입상작
학생부 장원
어느 여름날
홍지연
옷 속을 파고드는 뜨거운 더위를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부엌으로 가 냉장고를 열고, 꽝꽝 얼린 얼음과 팥빙수에 넣을 재료를 꺼냈다. 언니가 얼음을 갈고있는 동안, 난 아버지를 깨우러 안방으로 갔다.
“아빠, 지금 팥빙수 만들고 있는데 같이 먹어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주무시던 아버지가 게슴츠레 눈을 떠 잠시 동안 날 바라보시더니, 뒤척이며 다시 눈을 감으셨다. 안 드시겠다며 짜증을 내는 아버지를, 나는 무슨 고집이었는지 계속 흔들어 깨웠다. 육중한 아버지의 몸을 흔들다, 무심코 투박하고 못생긴 손을 보았다. 아버지의 손을 들고, 이쪽 저쪽 살펴보며 조금 놀랐다. 언제부터 아버지의 손이 이렇게 못생겨 졌을까. 이 작은 상처들은 어디에서 다치신 거지? 조금은 거칠게 손을 빼내신 뒤, 다시 잠을 청하는 아버지를 보며 우두커니 서있었다. 몇 년 전, 그 거친 손으로 날 채찍질하시며 화내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 날도 아버지는 찌는 듯한 더위를 참지 못하고 시큼한 땀 냄새를 훌훌 풍기셨을 것이다. 더위가 가시려 하는 초저녁쯤에, 아버지는 조금 화난 듯한 목소리로 거실에서 날 부르셨다. 방문을 열고 더위에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걸어오는 나에게 아버지가 내미신 것은 핸드폰 청구서와 학교에서 온 성적표였다. 생각보다 너무 많이 나온 통화료와, 나의 불성실함으로 인해 좋지 않은 결과가 표시된 성적표를 가만히 바라보다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번만큼은 대들지 말자고 다짐한 나는 죄송하다고 작게 중얼거렸다. 똑같은 내용의 잔소리지만 한 단어, 한 단어 귀담아 들으며 반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밀려드는 짜증에 소리 높여 말대꾸를 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아버지는 몽둥이를 드셨다. 씩씩거리며 울음을 터뜨리는 나를 보며, 아버지는 굳은 얼굴로 말씀하셨다.
“아빠도 많이 힘들지만 너 하나 잘 키우려고 이렇게 더운 날에도 땀 뻘뻘 흘리며 일하는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으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난 더 이상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날, 잠이 들기 전까지 빨갛게 부은 눈으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내내 흘렸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몇 년 후, 아버지의 지친 손을 보며 다시 목에 메어 왔다. 통통하고 기름진 것이 소시지를 닮았다며 나의 놀림감의 대상이 되었던 그 손가락이, 그날은 너무도 안쓰럽게 느껴졌다.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일어나는 아버지가 볼까봐, 재빨리 방에서 나와 가득 고인 눈물을 닦아냈다. 부엌으로 들어서자, 예쁜 그릇에 담긴 소복한 얼음 위에 달콤한 떡과 팥물을 넣고 있던 언니가 이상한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찬장에서 그릇을 하나 더 꺼내어 얼음을 담은 뒤, 예쁜 팥빙수를 만들어 쟁반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아버지는 방에서 나와 나 때문에 잠이 깬 거라고 투덜거리며 팥빙수 한 숟가락을 입에 털어 넣으셨다.
아버지의 시큼한 땀 냄새가 그 날 오후의 노을을 물들여 갔다.
학생부 운문 우수
어느 여름날
홍수연
오늘은 그래서 비를 기다립니다. 거짓말 같이 화창한 그가 안스러, 어루만지면 조각조각 바스러질까 조바심이 난 것입니다. 그리 짜증내도, 나 괜찮다고 거짓부렁 웃음 지으며 말입니다. 뜨거운 사랑에 내가 타버릴까 다가가지 못한 것도 모르고, 그렇기에 형체 없는 무언의 위로가 부드러운 속삭임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단 말입니다. 표정 없는 당신은, 비밀 같은 밤에도 질퍽질퍽한 아픔을 숨겼단 말입니다. 그 것이 내겐, 베어도 베어도 벌겋게 물들지 않는, 가려운 아픔이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당신, 오늘도 거짓말같이 쨍쨍 웃을 때, 괜시리 나는, 눈물이 난 것입니다.
학생부 산문 우수
어느 여름날
육소연 <베벌리힐스고 11학년>
“아아, 덥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하늘도 쾌청, 바람도 거의 안 불어 모든 게 멈춘 듯 보이는 그림 같은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사람 모두 불쾌지수 200%의 위력을 맛보고 있었다. 물론 나도 포함해서. 이러다가 아까 산 떡에서 쉰내라도 나기 시작하면 울어버릴 것 같았다. 시골의 한적한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물론 탈 타이밍이 어긋났을 때에는 더하다. 어린 시절의 경험을 이용하자면, 이럴 땐 노인 분들을 주시하고 있어야 된다.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감각인 것일까, 그들이 슬슬 왔을 때가 됐는데 라며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하면, 정말로 어김없이 저 멀리서 버스가 보이는 것이다. 난 한때 그들이 날씨를 허리 아픈 정도만 맞추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아무튼, 이번에도 어김없이 한 할머니께서 짐을 주섬주섬 챙기시자마자, 저 멀리서 흙먼지를 날리며 버스 한 대가 달려온다. 5년 전과 한치 다른 모습도 없이.
* * * *
“니가 서울서 온다던 이람이가?” 왠 전형적인 시골 소년의 모습을 한 사내가 대뜸 물어왔다. 박박 깎인 머리에 목이 늘어난 러닝 셔츠를 입은, 한 중2정도 됐을 법한 외모. 나를 데리러 올 것이라고 한 사람이 맞는 모양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얼굴 가득 반가움이라도 표현할 듯 벌쭉 웃으며 말했다. “가스나, 허벌나게 이쁘네!”
아… 아저씨 같애. 나는 순간 주춤했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던 타입의 사람이랄까. 보통 내 또래 남자애들은 이런 얘기를 대놓고 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놓고 순위를 매기거나 하긴 하지만. 내가 대답이 없자.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큰소리로 껄껄껄 웃으며 내 손목을 잡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다지 크지 않은 마당에 역시 그다지 크지 않은 전형적인 시골집 이었다. “할마이! 손녀 왔수다!” 애늙은이, 하는 짓이 아저씨 같아서 즉석에서 별명을 붙여보았다, 가 외치자 미닫이문이 삐걱거리며 열리더니 추석 때나 설날에 가끔 뵀던 외할머니가 나오셨다.
“안녕하세요?” 나는 왠지 어색한 마음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인사드렸다.
* * * *
“할머니이이이~” 나는 외쳤다. “오오! 감이야~” 외할머니께서 외치신다. 우리는 남북 가족 상봉을 연상케하는 분위기 속에 오랜만에 만남을 즐거워했다. 내가 쓰던 방에 짐을 풀어놓고, 떡과 청주를 주섬주섬 챙겨 나오자 할머니께서 물으신다. “성묘 가는 거냐?” 그렇다고 말하고 웃었다. 할머니는 조금 걱정이 되셨는지, 작년에도 또 재작년에도 그전에도 물어보셨던 질문을 물으신다. “아직도 너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냐?” 난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설마요.”
* * * *
할머니께서 마을을 구경시켜 주라고 말씀하신 덕분에, 난 다시 애늙은이의 손에 붙잡혀 끌려 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다가 애늙은이가 대뜸 말했다. “이름이 이감이라고? 성씨가 이고 이름이 감이가? 특이하네~. “댁이 뭔 상관이야”. 라고 쏘아주고 싶었으나 말해봤자 좋을 일이 없을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실은 난 내 이름에 대해서는 좋은 기억이 없었다. 매사에 무관심한 아빠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날 낳고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 이름을 짓게 되자, 적당히 창 밖을 보다가 감이 열린 것을 보고,(난 가을에 태어났다) 그럼 그냥 감이라고 하자. 라는 한마디로 끝을 보셨다. 그 덕에 어릴 적부터 내 별명은 영감, 썩은 감, 홍시, 이감자 등의 여자아이로서 치욕적인 명칭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러는 니 이름은 뭔데?” 난 왠지 발끈해서 반말로 물었다. “나? 박이준이다. 박이준. 그나저나. 니 연장자한테 막 반말이고?” 왠 건방진 꼬맹이냐 라는 애늙은이~ 아니 이준의 말에 왠지 오기가 생겨서 대답했다. “그럼 너네 오빠는 일준이야? 동생은 삼준? 이름 웃기네~” 내가 있는 데로 비꽜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준은 놀랍다는 듯 눈을 휘둥그래 뜨면서 말했다. “니 점쟁이가? 우째 알았노? 대단하데이~.” 그런 반응에 또 아저씨 같은 웃음을 보고 있자니 왠지 더 오기부리기도 귀찮아졌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그때 다시 이준이 내 손목을 잡더니 어디론가 빠르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야아~ 가스나 니 마음에 든다. 내 좋은 거 구경 시켜 주마.”
* * * *
시냇가에는 여전히 차고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예전에 이준 오빠랑 같이 봤던 개구리나 송사리, 그 외에 꼴 보기 싫던 거머리 같은 것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쭈그려 앉아 물이 흘러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디서 떨어졌는지 아직 물들지 않아 초록빛이 선명한 단풍잎이 물을 따라 흘러간다. 나는 그것을 집어 올려 잎사귀 부분을 잡고 중얼거렸다. “악수.”
* * * *
“왝. 난 개구리가 그렇게 미끄덩거리는 건지 몰랐어.” 나는 아까 개구리를 만진 감촉이 남아있는 손을 털면서 투덜거렸다. 아빠가 사고로 돌아가셔서 오게된 외할머니 댁에 머문지도 벌써 1주일째. 나는 이준이랑 제법 많이 친해져서 여기저기 함께 놀러 다니고 있다. 이제 슬슬 저 아저씨 같은 웃음소리에도 적응이 되어있고. “오늘도 우물가 보러 갈끼가?” 이준이 물었다. 나는 힘차게 끄덕였다. 마을 뒤편에 인기척이 드문 우물이 있다. 그 우물 안을 들여다보면 까마득한 어둠 속에 무언가 반짝이고 있는데, 그건 바람에 물이 출렁거려서 그런 것이라 이준이 그랬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있는 것을 좋아했고 또 그것을 바라보는 시간을 좋아했다. “저 물 한번 직접 퍼 올려서 보고싶다.” 내가 요 몇 일 버릇처럼 말하곤 하는 말이다. 물론 깊은 뜻은 없었다. “그르냐?”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물론 다른 뜻은 없으리라.
“초록색 단풍잎이 뭐가 좋아?” 난 의아해서 물었다. “이것도 제법 운치있고 좋지 않은가?” 이준은 또 뭐가 좋은지 낄낄거리며 단풍잎을 뜯었다. “단풍잎은 모양이 왠지 손 같아서 싫어.” 내가 투덜거리자 잠시 생각하던 이준은 또 다른 한 장을 뜯어 내게 주며 말했다. “단풍잎이 좋아지는 방법이 있다! 이래 잡아봐라” 나는 그가 하라는 대로 줄기를 잡고 잎을 앞으로 향하게 잡았다. 그러자 그도 똑같이 잡더니 내 단풍잎에 그의 단풍잎을 겹치며 말했다. “잘 부탁 합니더~.” 내가 이게 뭐야 하고 이맛살을 찌푸리자 그가 말했다. “악수.”
* * * *
“잘 지냈냐?” 나는 무덤에 청주를 뿌리며 말했다. “5년이 지났으니~ 20살 맞지? 성인이 된걸 축하해~ 오빠.”
* * * *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아이고오~ 이게 무슨 일이니 이게~.” 옆집 할머니, 우리 할머니의 절친한 친구이자 박이준 형제들의 친할머니가 통곡하신다. “세상에, 아직 나이도 어린데”, “안됐어요 정말” 주위에 잔뜩 몰려있는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심장이 터질 듯 뛰는 가운데, 나는 조심스레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다. 웬 사람이, 정확히는 내 또래의 남자애가, 썩은 물에 퉁퉁 불어서 누워있었다. 아니 죽어있었다. 원래의 체형을 무시하듯 뒤룩뒤룩 오른 살은 창백하다 못해 파란색을 띄고 있었고 여름이라 썩는 속력이 배가 된 지금, 우물 속은 시체 썩는 냄새로 가득했다.
나는 연신 헛구역질을 하며 다시 자세히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다. 박이준이라기 보단 박이준이었던 살덩어리가 물을 뜨려고 했는지 한 손에 작은 바가지를 쥐고 하늘을 응시한 채 썩어가고 있었다.
* * * *
나는 무덤을 가만히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누가 우물물이 진짜로 보고싶대?” 뭔가 더 말하려 했으나 목이 메여 입을 꾹 다물었다. 울지 않을 테다. 울지 않을 테다. 계속 속으로 다짐하며 숨을 고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난 그 보이지 않았던 시간이 좋았던 거라고.” 다시 숨이 막혀왔다. 3형제라서 여동생이 있었으면 했다고 했었다. 이왕이면 귀여운 여동생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와서 다행이라고 했다. 눈에서 찝찌름한 물이 더디게 흘러나왔다. “미안. 미안. 오빠 미안.”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살아있을 때 한번쯤은 오빠라고 불러둘걸. 후회가 파도 밀려오듯 밀려왔다. 8월 중순의 어느 날. 아직 단풍잎은 푸르고, 매미는 시끄럽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