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집사람이 내 얼굴을 자세히 드려다보며 ‘참 안됐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목사로서 삶의 반경이 제한받고 사역상의 스트레스도 적잖게 받음에 대해 측은히 여기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나 역시 언젠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피곤함에 겨워 식사도 거른채 곧장 침상에 묻힌 집사람을 보면서 퍽 안스럽게 여긴적이 있었다. 사모가 아니었다면 자신의 전공분야에 몰두한채 지금보다는 좀더 활력있고 편안하고 밝은 삶을 누리고 있었을텐데...배우자에 대해 별로 해준 것 없이 고생만 시키고 때론 작은 실수조차 용납치 않았다는 자괴감에 간혹 가슴이 시리고 아련할 때가 있다. 물론 그때마다 앞으론 세심한 배려를 기울여야겠다는 각오를 하지만 말이다.
최근 한 젊은 미국목사부부의 사연을 듣고 마음이아팠었다. 교인들에게 평판이 좋았던 사모가 경제문제로 목사남편을 총으로 쏴 살해한사건이었다. 분명 끔찍한 사건이었지만 오죽하면 아내가 남편을, 그것도 성직자부부사이에 그런 불행한 일이 발생했을까 하는 생각에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가측은히여기지기만 했다. 집사람, 그리고 위의 젊은목사부부뿐 아니라 건강문제, 직장문제, 자녀문제, 영적문제로 어려움에 봉착한 사람들을 대하면 불쌍한 마음에종종 가슴이 저려온다. 이번 월드컵축구대회 우리나라의 첫 상대였던 토고선수들이 시합에 진채 쓸쓸히 운동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불쌍함을 느꼈었다.
패자의 서글픔이 참 안돼보였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불쌍한 사람들이 참 많다. 가난, 무지, 전쟁, 질병, 이별, 질고, 압제, 차별, 자연재해등에 시달리며 눈물짓는영혼들이 수두룩하다. 죄가 존재하는 한 지구촌에는 비극과 불행이 그칠 날이없다. 세상은 인생의 불행앞에서 우는 자들에게 왜 그런 고난당하느냐고 묻는다.
비극앞에서 현대인들은 생각이 너무 많다. 인과응보를 논하고 시비곡직을 따지며 책임추궁등 대책마련에 부심한다. 허나 그런 일들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상처받은 영혼을 대해 우리의 할일은 긍휼, 오직 긍휼을 베푸는 것이다. 자비와 사랑의 마음을 펼치는 일이다. 사실 세상이 적막한 것은 삶의 환경이 열악해서도, 생의 풍토가 척박해서도 아니다. 긍휼함이 모자라서이다. 아무리 고난지수가 높아도 긍휼이 보장된다면 상처, 아픔이 치유되고 행복이 스며든다. 2000년도 한국의 국민드라마였던 “허준”에서 허준의 스승이 ‘의원들은 환자에 대해 긍휼함을 가져야 한다’말했다. 남편은 아내에게, 부자는 빈자에게, 자유자는 압제당하는자에게, 승자는 패자에게, 목사는 성도들에게 긍휼함을 나타내야 한다. 긍휼함을 나타내야 할 근본이유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이다. 삭막하고
힘든 이때, 단순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돌아가서 베풀어야 할 긍휼을 베풀자.
지금이 주님의 은총과 사랑, 따사함, 긍휼을 보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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