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은 스트레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산업이 발달하고, 생활이 편리해졌다고 두통(스트레스)마저 덩달아 없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현대인은 스트레스의 시대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스트레스와의 전쟁이다. 골프를 친다, 스포츠를 즐긴다… 나름대로 스트레스와 전쟁하고 있지만 스트레스의 완전 정복은 쉽지 않다. 스트레스는 왜 오는 것일까? 삶이 복잡해지고, 물질 문명이 불러오는 끝없는 욕망 등이 한 이유일 것이다. 모든 것을 소유한 사울왕(구약성서)이 참을 수 없는 두통에 시달렸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울은 다윗이 타는 비파로 일시나마 시름을 잊었지만 그 자신이 순수함이 없었기에 결국은 파멸했다.
음악은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인생의 속성과도 닮았다. 땅위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목적을 두고, 바람처럼 살다가라는 신의 계시인 것 처럼… 무소유의 마음이야말로 음악이 지향하는 바, 순수한 마음이다. ‘음악은 신이 주신 최대의 선물’이라는 바하의 고백도 있듯이 가난한 마음에 음악이 들려오고… 음악이 들려오는 마음에는 평화도 멀지 않다.
가난한 음악으로 소개하고 싶은 작품이 슈베르트… 바하, 무소르그스키 등의 작품이다. 이들의 음악은 거창하지 않으면서도 진실된 감동으로 영혼을 포근하게 감싸 주는데 특히 무소르그스키의 경우는 심도 깊은 우울까지 겸비, 내면에 울리는 감동의 힘이 크다.
러시아 작곡가 하면 흔히 떠올리게 되는 사람이 차이코프스키이다. 무소르그스키(러, 1839-1888)하면 모르는 사람이 많고, 안다고 해도 만화영화 ‘판타지아’에 나오는 ‘민둥산의 하룻밤’의 작곡가 정도에 그칠 뿐이다. 무소르그스키는 대중에는 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작곡가로서는 드물게 ‘천재’라는 단어가 따라붙는, 몇 안되는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모차르트가 신동이었다면 무소르그스키는 말그대로 천재의 재능을 소유한 작곡가였다. 여기서 ‘천재’라함는 선율을 화려하게 표현하는 재주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선율의 소박함, 음악의 본질을 유출해 내는, 감동을 주는 재주를 가리킴이었다. 무소르그스키는 49세로 비교적 단명하고 말았는데 이는 천재적인 재능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에서는 이해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무소르그스키는 교향시 ‘민둥산의 하루밤’이나 피아노 곡에서 관현악곡으로 화한 ‘전람회의 그림’ 그리고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코반치나’등 기악곡과 성악부문에서 다양하게 재능을 나타냈는데 모두 특출한 개성이 드러난 작품들이었다. 비록 많은 작품을 남기지 않았으나 그가 음악에 남긴 흔적과 그 열정은 남다른 것이었다. 특히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는 1868년에 착수, 6년의 세월동안 심혈을 기울인 대표작이었다. 1589년 제정 러시아에서 일어난 실화를 주제로, 조카를 암살하고 왕위에 오른 보리스 왕의 번뇌를 그린 작품으로, 압권은 보리스가 조카 드미트리의 환영에 시달리다가 결국 병을 얻어 죽게 되는 데드 신으로, 무소르그스키의 천품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부분이다.
무소르그스키는 감동에 관한한 타협을 모르는 작곡가였다. 음악의 피상적인 아름다움을 인정하지 않았다. 외적인 수법보다는 질을 추구했으며 자율성과 개성을 중시했다. 그의 음악은 다소 서투르고 괴이했으나 음악에서 ‘진실’이 주는 감동의 힘을 굳게 믿었고,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를 통해 이를 실증해 보였다. 비록 정치적인 이유로 공연이 금지되면서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졌으나 그가 보여준 수법의 비범함, 독창성은 음악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마지막 보리스의 데드신이야말로 삶과 죽음,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알게해주는 감동의 역작이었다. 죽음에 관한한 무소르그스키 만큼 감동을 주는 작품을 남긴 작곡가도 드물었다. 과연 인간의 그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죽음 뒤의 안식은 무엇인가. 영원한 무… 연민 그 자체인 죽음…. 삶은 바로 죽음이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무소르그스키는 온몸의 전률, 감동의 ‘진실’로 전하고 있다.
감동의 소리는 어디서 오는가? 무엇보다도 장엄한 소리여야할 것이다. 아무리 청아한 소리라해도 왜소하고 들릴락 말락한 소리로는 감동을 줄 수 없다. 그러면 소리만 크다고 모두 감동적인 소리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음악은 무엇보다도 피상적인 소리가 아니라 뜻이 깊어야 한다. 장중하고 내면적이고, 진실된 소리가 감동을 준다. 그러면 심각하고 내면적인 소리는 모두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일까? 그것도 아닐 것이다. 감동의 소리는 무엇보다도 공감을 주는 소리여야할 것이다. 인류 모두가 느끼는 슬픔, 환희의 공감대가 있어야할 것이다. 장중하게 퍼지는, 죽음 저편에서의 음악은 어떤 소리로 울리고 있을까? 환희일까, 아니면 절규일까? 아니면 모든 서러움이 씻겨 나간 뒤의 피안의 아름다움일까? 희대의 천재 무소르그스키가 전하는 죽음 저편의 ‘진실’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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