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에도 어김없이 부활절이 돌아왔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니 이는 보통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왜 그럴까?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는 부활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부활절에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을 교회를 찾는다. 금년에는 똑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여 맹목적으로 믿을 것을 강요만 할 것이 아니라 “예수 부활이 과연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된다면 더욱 좋지 않을까?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하려면 먼저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보아야 한다. 성서는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죄가 이 땅에 들어와 그에 대한 벌로 사람이 죽게 되었다고 말한다. 생각해 보면 너무 억울하다. 부모의 잘못 때문에 자식들이 벌을 받아야 한다니 공평하지 못하다. 벌이 죽음이니 너무 가혹하다. 벌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죽음을 반기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한다”는 말처럼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만 있다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죽지 않으려고 한다.
모두가 죽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면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기 위하여 어떤 사람은 생명 보험과 묘지를 산다. 또한 유언서를 작성하여 죽은 후의 장례와 유산 처분을 준비한다. 이런 준비도 필요하지만 죽음에 대한 자신의 관점과 태도를 점검해 보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예수는 죽음을 아버지로부터 와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에 비유했다. 그렇다면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라는 시가 성서가 가르치는 죽음을 말하는지 모른다. 귀천이 말하는 죽음은 소풍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창조주와 인간과의 관계는 영원하며 죽음이 결코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사도 바울은 자신은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고 또한 예수와 함께 부활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기가 사는 것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살고 있기에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한다. 자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한다. 그의 관심은 자신의 죽음 혹은 죽음 이후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이미 부활한 자처럼 사느냐 이었다.
부활절은 맞이하여 오늘도 예수 부활을 노래하고 부활의 메시지가 선포될 것이다. 단순히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성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 부활 신앙을 가진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 이스라엘에 가서 예수의 무덤을 방문했을 때 안내자가 하던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예수를 빈 무덤에서 찾지 말고 제자들의 가슴 속에서 찾으라”고. 그렇다. 제자들은 자기 목숨이 다하기까지 예수의 부활을 외치다가 갔다. 그들은 이미 죽음을 초월한 사람들이었고 자기 목숨을 바쳐서 사명을 다했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부활이 오늘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용환 목사(새빛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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