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C데이비스 이철수 심포지엄에서 참석자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고 있는 이철수씨. 오른쪽은 이경원 기자.
“한인사회에 빚진 느낌”
“자서전 집필·내달 관련 심포지엄 참가” 밝혀
지난 1973년 6월3일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목격자의 진술에 의존해 한인 이철수씨를 용의자로 지목했고, 이씨는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1978년 1월29일 새크라멘토 유니언의 이경원(K.W. Lee) 기자는 재판부의 판정에 의문을 제기한 탐사보도 기사를 내보냈고, 아태계 커뮤니티의 구명운동이 시작됐다. 1983년 3월28일 억울한 누명을 썼던 이씨는 자유의 몸이 됐다.
70∼80년대 아태계 인권 및 정체성 찾기 운동의 상징인 ‘이철수 사건’의 주인공 이철수(54)씨가 20여 년만에 공식활동을 재개했다.
UCLA 아태연구센터가 발행하는 학술지 ‘아메라시아’(Amerasia) 저널 최신호는 UC데이비스 리처드 김 교수가 작성한 ‘이철수-이경원 심층 인터뷰’를 게재했다. 지난해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실시한 이 인터뷰를 통해 이씨는 20여년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심경을 고백했다.
출감 후 마약에 손을 대는 등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던 이씨는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한인사회에 무한한 부채의식을 느낀다”며 “현재는 샌프란시스코로 다시 돌아와 책을 읽으며 자서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자신의 구명운동에 앞장선 아태계 커뮤니티의 헌신에 대해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은 조건 없는 도움과 단결이라는 인간의 존엄성을 보여줬다”고 감사를 잊지 않았다. 그는 “내가 백인이나 흑인이었으면 무죄가 밝혀진 뒤 큰돈을 받았겠지만, 어떠한 보상과 사과도 없었다”며 미국 사법시스템의 문제점과 인종차별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철수 사건을 파헤쳤던 이경원 기자는 “당시 구명운동에서 중심역할을 못했던 한인사회는 (이씨 석방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스튜어트 헨론 변호사에 아무런 사의도 표시하지 않았다”며 “4.29에서 경험했듯이 한인사회가 이철수 사건의 교훈을 실천하지 못해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일침했다.
이철수씨는 지난 2월22일 UC데이비스에서 열린 ‘이철수 심포지엄’에도 참석해 “소수민족으로서 억울하게 당했던 일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이경원 기자, 변홍진 전 한국일보 국장과 함께 자서전 집필도 시작한 이씨는 오는 5월 LA에서 열리는 이철수 사건 심포지엄에도 참여해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알릴 계획이다.
<이의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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