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삶
▶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창 밖에는 흰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힘껏 버티고 있던 소나무 가지가 덮이는 눈 때문에 견디다 못해 허리를 굽히고 소리를 내면서 눈을 떨구고 있었다.
철수는 하얗게 덮인 언덕길을 바라 봤다. 아버지가 서서 자기를 기다리는 듯 싶은 착각에서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 아버지가 문밖에 내동댕이쳐진 여행가방을 들고 눈이 수북히 쌓인 언덕을 넘어 사라져간지 벌써 일곱 해가 지났다. 그때도 철은 이층 창가에 기대서서 지금처럼
언덕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한없이 미웠지만, 철의 눈에는 흥건히 눈물이 고여왔다.
언덕에는 어느새 아이들이 몰려와서 차례로 미끄럼을 탔다.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퍼져갔다. 그때도 그랬다. 아버지는 눈이 많이 오는 날은 쉬는 날이어서 동네 아이들을 위해 숲으로 향한 언덕에 눈길을 다져서 매끄럽게 해주셨다. 아이들은 좋아서 철이를 따라서 미끄럼을 신나게 탔다. 철이는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했다.
철의 아버지는 운수회사 장거리 운전사로 어머니는 과자공장의 기술자로 일하셨다. 부유하지는 못했지만, 철이네는 쪼들리는 일 없이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아버지가 상습적으로 도박을 하시자 철의 집은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수시로 주위에서 높은 이자 돈을 빌려 아버지가 잃은 돈을 메꾸느라 혼신을 다하셨다. 급기야는 집을 팔고 아파트로 가야 했다. 아버지는 돈을 잃고 집에 돌아오시면 만취한 채로 마구 집안 물건을 부수는 투정을 부리셨다. 경찰이 집에 들어 닥치고 아버지에게 경고를 하고 간 한참 후에도 철은 침대 밑에서 그냥 잠들어 버렸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철이에게 해마다 주소 불명의 작은 소포가 왔다. 그 안에는 흙색의 매끄러운 장난감 코끼리가 들어 있었다. 언젠가 아버지와 함께 동물원에 갔을 때 코끼리를 가리키시며 코끼리의 자식사랑은 유별난 것이라고 귀띔해주셨는데, 그때 새끼 코끼리 한 마리가 어미 코끼리의 다리 사이에서 재롱을 부리는 것을 아버지는 그렇게도 좋아하셨다.
화덕의 선반 위에는 일곱 마리의 흙색 코끼리가 나란히 서서 반짝이고 있었다. 철이는 선반을 바라보면서 아버지가 그리워졌다. 이때 옆문이 열리며 어머니가 만면에 미소를 지우며, 양손에는 코끼리가 그려진 초대권을 들고 있었다. 어머니는 흥분해서 말을 더듬으며 철이를 껴안고 라스베가스 왕복 비행기표와 엠지엠 호텔 숙박권, 그리고 서커스 관람권 두 장을 크리스마스 상여금으로 받았다고 기뻐하셨다.
종이 눈이 내리고 곳곳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오고,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이끄는 마차를 타고 철이와 어머니는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 사이를 지나서 공연장에 도착했다. 공연장 입구에는 흰 상아가 달린 흙색 코끼리가 그려져 있고 푸른 천장에서 흰 눈이 뿌려지고 있었다. 멀리 코끼리 일곱 마리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철이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 옆에 서서 철이와 어머니를 향해 웃고 있는 멋진 동양인이 아버지가 아닌가! 아버지는 손을 흔드시며 환하게 미소짓고 계셨다.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