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면 사람들은 인생의 그림자(추억)를 되돌아 보게 된다. 그 속에는 무수한 흔적이 들어있다. 다시는 되밟고 싶지 않은 고통의 흔적도 있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아련한 추억도 있다. 음악은 나그네와 같은 인생에서 되돌아 가고 싶은… 흔적에 대한 회상이요 감상이라할 것이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영원회귀의 쳇바귀 속에서 인생이 쉬고자하는 곳은 어디일까. 영혼에 날개가 달렸다면 어디론가 먼… 광활한 대지… 지평선이 끝가는 곳 대초원으로 날아가련만… 그 속에서 한마리의 새가 되어 나그네 였던 시절의 그 고달픈 역정을 회상하며 그 외로움의 흔적에 흐느끼며 존재에 대한 영혼의 위로를 찾을 것을…
보로딘의 교향곡을 듣고 있으면 어린 시절에 보았던 반딧불이 생각난다. 아마도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이었던 것 같다. 시골의 외딴 외할머니 집은 커다란 산을 하나 넘어야 하는 깊은 산골 마을이었는데 그 곳에 가기 위해서는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완행 열차를 몇번 갈아타야 했었다. 어머니는 학교에도 입학기 전인 나를 데리고 여행을 자주 하곤 하셨는데 당시 기차여행은 주로 밤으로의 긴 여행이었고, 검은 철마는 어디론가 불안과 설레임을 싣고 미지의 세계로 한없이 달려가곤 했었다. 시골의 반디불은 실제로 보았었는지 아니면 어떤 몽롱한 추억속에 혼돈되어 생각나는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반디불이 날아다니던 시골의 밤은 도시에서는 볼수 없었던 아련한 환상의 원시성이 있었다.
보로딘의 음악에서 왜 반딧불의 아련한 환상이 피어오르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의 음악이 어떤 동양적 서늘함을 머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둡고도 광활한 중앙아시아적 정감은 마치 나그네의 고단함같은 애잔한 감정이 녹아있어 동양적인 멜로디에 익숙한 우리들의 귀에는 색다른 정감으로 다가오고 있는 곡이다.
보로딘 하면 교향시 ‘중앙 아시아의 초원’이 떠오른다. 이 곡은 단 6분간 연주되는 짧은 곡이지만 보로딘이 아니면 들려줄 없는 희귀한 곡이다. 외형은 서양 수법이지만 내용은 동양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보로딘은 러시아 동쪽 카프카즈의 에메레티아국 후예로 태어나 러시아 5인조로 활약하며 러시아 민족음악 증진에 이바지 했다. 5인조 중에서도 보로딘의 실질적인 역할은 서양 음악을 통한 동양의 서정미를 담아내는 일이었다. 보로딘의 중요한 작품 중의 하나인 ‘중앙아시아의 초원’이나 교향곡 2번 등을 들어보면 도저히 서양음악이라고 볼수 없는, 말할 수 없는 동양적 신비가 넘쳐난다. 이곡은 아마도 지상에서 작곡된 가장 아름다운 작품 중의 하나일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판소리를 듣는 듯한 말할 수 없는 한과 멋이 짙게 풍기고 있는 데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삼삼한 맛’…, 명쾌한 철학적, 종교적 선열보다는 다소 인간적인… 정에 끌리면서도 깊은 시름과 슬픔을 머금고 한 토해내는 듯 내면의 애잔함이 넘쳐난다. 영혼의 휴식을 원하는 사람은 지금이라도 보로딘의 교향곡 2번의 3악장(안단테)을 들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심포니가 소리에서 진화하여 이처럼 영혼을 삼삼한 감정으로, 내면 깊이 파도치게 할 수 있을까. 이것은 결코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음악이 아닐 것이다. 수천 수만년 세월속의 풍랑이 말하고자하는 대지의 장엄한 울림… 하나의 소리가 검이 되어 영혼의 골수를 베고 어혈을 쪼게 피의 무지개가 되어 대초원으로 환원되는 흐느낌의 목소리… 그 한의 소리를 그저 스쳐갈 무심의 인간이 있을 수 있을까. 보로딘의 음악은 결코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추억의 긴… 대자연의 목소리 그 울림이다.
보로딘 하면 러시아 5인조 중에서도 무소르그시키와 함께 가장 개성있는 작품을 남긴 작곡가로 유명하다. 러시아 5인조라함은 큐이, 발라키에프, 림스키콜사코프, 보로딘, 무소르그스키 등을 말한다. 서구의 낭만주의와 대항하여 러시아만의 지역적, 민족적 특수성을 발전시켜 나가자는 취지로 결성됐는데 그중 보로딘이 가장 러시아적인 음악을 남긴 작곡가로 유명하다. 무소르그스키의 경우 특출한 재능 때문에 민족음악을 추구하다 오히려 인상주의를 탄생시켜 서구로 역수출한 경우지만 보로딘만은 본래의 취지를 훌륭하게 완수, 러시아 음악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당시 리스트는 보로딘의 음악을 듣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보로딘만이 간직한 시적재능 때문이었다. 보로딘은 오페라 이골공으로 크게 이름을 떨쳤으나 교향곡 3곡과 현악 4중주 1, 2번등도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화학자 이자 의사였던 보로딘은 주로 주말이나 휴가를 이용하여 작곡에 몰두, 다작을 남기지 못했으나 페테르스부르크 대학의 화학 교수로서, 음악가로서 많은 업적을 남기고 87년 5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1877년에 작곡된 교향곡 2번은 교향곡 3곡중 가장 걸출한 곡으로 무소르그스키는 이 곡을 가리켜 ‘영웅적 슬라브 심포니’라곡 극찬했다고 한다.
1869년 부터 1876년까지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데 오페라 이골공의 작곡으로 완성이 늦어졌다. 1악장 알레그로, 2악장 스케르조, 3악장 안단체 4악장 피넬레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소개하고 싶은 3악장은 두터운 혼의 울림이 마치 동양의 피리, 서늘한 하프의 울림이 마치 가야금이나 비파의 울림처럼 동양적인 색채가 진하다. 보로딘의 교향곡에서 표출되고 있는 음악적 색채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없겠지만 쉽사리 들어볼수 없는 숨겨진 보석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동양적인 멜로디에 익숙한 우리들의 감성에 어필하는 깊은 맛이 일품인데, 영혼의 휴식을 위해 꼭 한번 들어볼 만한 곡이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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