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면에 글이 실리고 나면 가끔 학부모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글의 내용이 남 얘기 같지 않고 자신과 상황이 비슷해서 공감한다든지 아니면 글을 잘 읽고 있다고 인사를 받을 때면 좀 송구한 면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글로 내비쳐지는 ‘나’라는 사람과 ‘나의 실체’는 차이가 있어서 때로는 ‘나’라는 사람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잘 포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부모 교실이나 학교 행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학부모들과 만날 기회가 많은데 그때마다 그들은 자녀 교육의 어려움과 이민생활의 고됨을 토로하기도 하고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나름대로 잣대를 재보기도 하는 모양이다.
어느 날 A 어머니는 하시고 싶은 얘기가 있다며 학교로 찾아오셨다. 학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열심히 참석하시고 자녀 역시도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었으므로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되었지만 A 어머니는 누군가에게 속시원하게 얘기를 하고 싶다고 하셨다.
이민 브로커에게 속아서 가져온 돈을 모두 날리고 불안한 신분으로 하루하루가 고역이었음을 힘겹게 고백했던 그녀는 남편은 한국에서 기러기 아빠로 지내고 있으며 자신은 자녀 둘을 데리고 불편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하셨다.
이민생활의 불안함과 생소함이 주는 자신감의 저하와 정신적 외로움으로 견디기 힘들었던 그녀에게 나는 다른 학부모들과 서로 관계를 맺게 해주고픈 생각에 부모 교실의 참석을 권했었다.
이민생활의 답답함을 그룹을 통해 함께 나누며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생각에 심적인 불안감이 해소되고 그녀가 겪는 고통을 다른 부모들이 겪었던 갈등과 비교하면서 좀더 여유를 가지고 자신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부모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어하는 그들의 성숙된 모습은 그녀 스스로가 자신의 위치를 점검하고 자신의 문제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자신의 고통을 남과 비교하는 것이 얼마만큼 자신의 고통을 덜어낼 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주는 심리적인 동질감과 위로감이 아마도 그녀의 고통을 조금은 완화시킨 모양이었다. 본인 스스로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너무 화가 나고 자녀에게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말이 너무 무책임한 소리 같다며 자녀가 일류대를 가도록 희망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평범하고 반듯한 아이로 자라기를 희망하는 것이 왜이리 힘든 것인지 이제까지는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렸는데 이젠 그런 마음을 추스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젠 당당하게 일을 하면서 스스로 생활을 할 수 있어 마음이 편해졌으며 아침엔 성인 영어 학교에서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며 수줍게 웃으셨다.
톡 쏘는 맛에 길들여진 세상살이, 콩 볶듯이 튀어도 그런 힘든 과정을 거쳐야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는 할 수 없었지만 최소한 그녀의 눈에 눈물이 다시는 고이지 않도록 맞장구 쳐주고 그녀의 깊은 눈을 진심으로 쳐다봐 주며 그녀의 수고와 열정을 인정해 주는 것, 그것이 지금 그녀가 필요한 것이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오늘의 일상을 훔치고 있을 그녀의 힘없는 몸부림이 마치 물 속의 오리처럼 물 밖에서 보는 사람에겐 우아하게 물위를 거닐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 모르지만 당사자에게는 필사적인 발버둥이라는 것, 그것이 왠지 나에겐 절박하게 들렸을 뿐이었다.
인생이란 그렇게 연습도 없고 편집도 없어서 더욱 절박할 수밖에 없고 만족보다는 후회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는 것, 삶이 고될지라도 생각은 높고 마음엔 열정을 가지고 스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또 추스르며 그렇게 살아갈 일이다.
솔직하고 용기 있는 그녀가 높은 위치에 올라서기보다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엄마, 아내, 그리고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것, 그것이 중년을 살아가면서 자녀를 양육함과 동시에 이뤄져야 하는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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