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터졌다. 피난민들이 줄을 지어 서울을 향하여 오고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간단한 짐을 싸라고 한다. 시골에 연고자가 있는 사람들은 피난을 가기 시작했고, 우왕좌왕하다가 2, 3일이 지나갔다. 남편은 형제가 모두 함께 가야 한다며 피난 갈 준비를 하라는 말을 남기고 흑석동 형제 집에 다니러 갔다.
그날 밤 12시경 폭음소리가 대단하고 집이 쓰러질 듯 몹시 흔들렸다. 아침 일찍 밖에 나갔더니 지난밤에 이승만 대통령이 한강다리를 건넌 후 다리를 폭파하였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한강물에 가득 빠져 죽었다는 말에 남편의 생사가 몹시 염려되었으나 안타까이 소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고, 남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피난을 갈 수도 없었다.
사람들 말이 지금 인민군들이 남영동 거리를 행진하며 오고 있단다. 청파동에 살던 나는 앞이 아찔하였다. 거동이 불편하신 어머님과 큰아들이래야 7세, 밑으로 두 아이들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 때 내 나이 28세. 막막하다기보다 기가 막혔다.
매일 시시 때때로 폭격이 쏟아지고 거리에는 부모 잃은 아이들이 늘어만 갔다. 우리 식구도 파편을 피하여 피난처나 되는 듯 효창 공원으로 가다보면 방황하는 너덧 살 난 사내아이들이 보였다. 처음 볼 때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나중에는 아주 발가벗은 가여운 아이들이 되어 있었다.
날짜는 정확치 않으나 이날의 폭격은 정말 대단했다. 청파동, 서울역과 쌍굴다리, 용산 중학교에 인민군들이 전쟁 장비들을 적재해 놓았기에, 한강다리 원효로 서적회사 등으로 집중적으로 폭격이 심했다. 곧 온 동네가 불바다가 되었다. 방공호 속에 들어가 앉아 있으려니 폭격치는 소리, 방공호가 다 무너지는 굉음에 다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남의 집 추녀 밑에 들어가 포대기를 쓰고 앉아 있으려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생의 애착… 어떤 청년은 팔과 다리에 파편을 맞아 흡사 육고간에 소다리 벗겨 놓은 듯 했다. 팔 떨어진 사람, 온 전신에 파편 맞아 죽어가는 사람. 한 어머니가 폭격통에 정신없이 몇 발 나오다가 아차 애들 생각이 나서 되돌아가려 하니 이미 집이 불로 덮여 군인이 못 가게 막아 할 수 없이 혼자 왔다며 창자가 녹는 듯 통곡을 했다.
효창 공원에 피신해 있다 해가 다 지고 다시 동네로 돌아올 때 길에는 죽은 사람들의 장례 행렬이 이어졌다. 불 속에서 살이 다 익어 까맣게 그을린 시체를 큰 그릇 같은데 담아 몇 사람이 들고 가면 그 뒤로 통곡하며 쫓아가는 가족들. 마지막 길 잘 가라는 식구들의 애절한 통곡 소리가 폭격 소리보다도 더 큰 소리로 동네를 에워쌌다. 죽은 시체들은 폭격 때문에도 그렇고 흙을 팔 연장도 그렇고 어물어물 얼굴과 배만 흙으로 좀 덮어줄 뿐이었다. 또 서울역 쪽을 갈려면 욱천이란 큰 개천을 끼고 가는데 (지금은 복개가 되어있다) 봉래동 다 가도록 군복 입은 시체가 수두룩히 쌓여 있었다. 그 때의 참혹했던 광경을 어찌 이 종이 위에 다 기록하리요.
공포 속에서도 시간과 날이 흘러 전쟁은 잠시 휴전이 되었다. 9.29 입성의 함성. 어머님과 어린애들의 손을 붙잡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남편은 시누님 댁과 함께 경상도로 피난을 갔다가 10월 3일경 돌아왔다. 서로 살아 만난다는 것이 꿈만 같아 서로 온 식구가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로 서로를 맞이했다.
어느새 55년이란 세월이 흘러 6.25 당시의 일들이 점점 더 멀게 느껴질지도 모르나 50여 년 전 그어졌던 휴전선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우리 나라는 피부로 느낄 수 없을 뿐 아직도 전쟁 중에 있다. 6.25를 맞아 전쟁의 참상을 돌아보며 우리 모두 통일을 소원하는 마음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하루 빨리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되기를 기원하며.
이정혜 /훼어팩스,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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