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 광고 문구로 자주 나오는 말이지만 강철환씨 가족만큼 이 말이 잘 들어맞는 집안도 드물다.
강씨의 친 조부모는 모두 제주도 출신이다. 일제 때 지긋지긋한 가난을 피해 일본으로 이주했다. 할아버지는 자그마한 쌀가게에서 시작, 나중에는 빠칭코 업에 종사하며 엄청난 돈을 벌었다. 1930년대 대다수 재일 한국인이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할 때 교토 최고급 주택가에서 일본인 하녀를 두고 살았다.
반면 할머니는 공장 노동자로 출발했다. 처음에는 키가 너무 작다는 이유로 공장에서 받아주지 않아 길거리에서 거지 생활을 하기도 했다. 밑바닥 인생을 철저히 경험한 그녀는 열성 공산당원이 됐다. 이처럼 사회적으로나 사상적으로 극과 극에 있는 두 사람이 맺어져 결혼 생활을 하며 가정을 일궜다는 것 자체가 운명의 힘을 느끼게 한다.
해방이 되자 강씨의 할머니는 조총련의 핵심인사로 열심히 뛰어 교토 지부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북한에서 재일 동포를 초청하자 전 재산을 기꺼이 헌납하고 제일 먼저 북송선을 탔다. 큰 아들이 일본에 남겠다며 친척집에 숨자 강제로 끌고 와 배에 태웠다. 니이가타에서 배를 타고 청진항에 도착한 이들은 새 조국 건설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꿈은 오래 가지 않았다. 불과 몇 달 전 같은 배를 타고 온 재일 동포들이 북한의 실상에 대해 들려주기 시작했다. 북한 수준에서 상류층 대접을 받았음에도 일본에서 자유와 풍요로움을 만끽하던 이들에겐 모든 것이 불만 투성이였다. 결국 1977년 어느 날 할아버지는 ‘반역자’로 몰려 체포되고 9살 난 손자 강철환씨를 비롯한 일가족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간다.
강씨의 어머니는 북한 간첩으로 일하다 피살된 아버지를 뒀다는 이유로 수용소 행은 면하지만 이혼을 강요당하고 생이별을 하게 된다. 한번의 판단 착오로 자식과 손자들을 강제수용소로 보내게 만든 할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그 후 10년 간 여덕 수용소에서 온갖 고생을 한 강씨는 1987년 갑자기 풀려나지만 1992년 결국 북한을 탈출, 한국에 정착하게 된다.
그 강씨가 14일 부시의 초청으로 백악관을 방문, 미국 대통령과 40분간 면담했다. 강씨가 자신의 일대기를 쓴 ‘평양의 수족관’을 부시가 읽고 그 저자를 만나 보고 싶다고 해 마련된 그 자리에는 딕 체니 부통령과 마이클 그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 스티븐 해들리 국가 안보보좌관 등 백악관의 외교·안보 핵심 관계자 전원이 함께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민간인을 이처럼 환대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또 그 시기가 노무현 대통령과의 면담 직후이자 6/15 5주년을 맞는 시점이어서 더욱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교토의 궁궐 같은 집에서 강제수용소로, 강제수용소에서 백악관의 귀빈으로, 강씨 일가의 스토리는 어떤 픽션보다 극적이다. 부시 대통령이 만나는 사람마다 일독을 권한다는 ‘평양의 수족관’을 한인들도 한번쯤 읽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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