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안식’이 있는 곳
(콘트라코스타 한인장로교회)
세상은 참 절묘한 곳이다. 우리에게 절대적 이중성을 요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 속에 사는 우리는 마치 서커스의 줄 타는 사람처럼 위험하게 살아간다. 이건 가면 쓰고 사는 거니까 “위선은 떠나거라” 하며 있는 속내를 맘껏 드러내놓기도 좀 그렇고, 그렇다고 ‘나만의 나’는 계속 숨기면서 ‘나 아닌 나’만 밝히며 사는 것도 좀 그렇다. 아마 이 둘을 다 해본 사람은 그 속사정의 불편함을 잘 알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현인들도 그 대안으로 ‘중용’이라는 것을 내세웠던 것 같다. 적절한 솔직함과 적절한 은닉을 동시에 유지시킬 수 있는 방식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중용’이라는 무척 고상한 어법으로 말해서 그렇지, 실제로는 그건 정말 서커스의 위험스러움이다. 그래서 세상사는 게 쉽지 않다. 내 자신을 적당히 드러내는 것과 적당히 감추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긴장은 끊이질 않는다. 그건 밖에 나가 그렇게 살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 확연하게 느낄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런 이중적 긴장 때문이었는지, 집에 들어오면 파김치가 되어 침대에 퍼석 누워버린다. 긴장이 풀린 까닭이다.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위험스런 장난질을 요구하는 세상을 탓하자는 것이 아니다. 아님 어떻게 하면 그 위험성을 잘 극복할 수 있을까, 그 긴장의 비법을 말하고 싶은 건 더욱 아니다. 그럼 뭔가? 그런 위험스런 삶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가정의 신비함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필자는 목회자다. 예수가 주시는 평안함으로 매끈하게 잘사는 것처럼 말할 것이고, 또 그렇게 타인들에게 보이기까지 하겠지만, 사실 그 위험한 줄타기는 목회자인 내게 더 충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세인들은 목회자들에게서 가장 절묘한 줄타기 장면을 보고 싶어 한다(일종의 보상심리, 대체효과 같은 건 아닐지). 그래서인지 집에 오면 더 퍼진다. 완전히 퍼져버린다. 집에 오면 더 아이처럼 되고 싶고, 더 까불고 싶고, 더 본능에 충실하고 싶고, 또 그렇게 막 구는 남편의, 아빠의 모습을 받아주는 아내와 아이들이 더 고맙고 더 좋다.
집은 그런 의미에서 신비로운 곳이다. 세상과는 전혀 다른 속성의 장소다. 필자는 그런 특성을 놓고 필자 교회의 주보에 연재하는 칼럼에서 ‘그 안식’(The Rest)이라고 표현했다. 본성에 충실해도 되는 이 세상의 유일한 곳, 그곳은 바로 가정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런 재미있는 상상을 해본다. 만약 집안에서의 내 옷차림을 교인들이 본다면, 만약 내가 가족들 앞에서 까부는 모습을 교인들이 본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하는 상상이다. 분명 대 실망!? 그러나 그들의 ‘대 실망’이 내 가정에서는 ‘대환영’이다. 그래서 가정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신비함이 있다.
5월은 흔히 가정의 달이라 하지 않는가? 교회에서도 그것을 주제로 설교하고 가르치고 돕는다. 하여튼 가정은 좋은 곳이다. 세상과 달라서 좋고, 그 철저한 다름이 세상 속에 엄연히 존재해줘서 좋고, 그래서 우리가 맘 놓고 마지막으로라도 찾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어서 좋고, 아무튼 좋은 곳이다. 가정의 ‘그 안식’ 생각해보았는가? 내 가정엔 ‘그 안식’이 있는가? 그 안식의 유무와 정도를 평가하면서 이 기회에 나의 가정을 더 사랑하고 아껴야 할 것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