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한인이 연전에 LA에서 거의 30년만에 고교동창을 만났다. 자신이 LA에 있는 것을 안 한국의 동창이 미국에 온다며 연락을 해왔지만 이름만으로는 얼굴이 가물가물했다. 그는 동창에게 사진을 e메일로 보내달라고 했고 동창의 가족사진을 보고는 옛 기억이 떠올랐다.
며칠 뒤 동창이 워싱턴 DC 가는 길에 LA에 들렀다. 이 동창은 군 간부였다. 특히 수조원을 ‘주무르는’ 무기 구매팀에 속해 있었다. 당시 미국, 프랑스 등은 한국에 고가의 전투기를 팔기 위해 다방면으로 ‘구애’의 손길을 뻗을 때였다. 별의별 로비가 다 들어갔을 터다.
그는 이 동창이 묵고 있는 호텔 방에서 단둘이 잠깐 대화를 나눴다. 같이 온 구매팀이 다른 방에 있어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진솔한 조언을 했다. “앞으로 별을 달고 군인으로서 명예롭게 살아가려면 단 한푼의 뇌물도 받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고교 졸업 후 한번 만난 적도 전화 연락한 적도 없는 사이인데도 달콤한 얘기 대신 쓴 소리를 했다. 동창은 사심 없는 충고에 고마워했다. 무기상과 식사할 때도 밥값을 자신이 내겠다고 했다.
최근 이민 온 한 직장인은 이민생활의 적적함을 달래려 고교동창 모임에 나갔다. 10여명이 정기적으로 회포를 푼다. “졸업 후 27년 동안 깜깜 무소식이다 어느덧 머리가 희끗희끗한 상태에서 만났는데도 옛 느낌 그대로다”라고 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 동창모임도 있지만 왠지 끄는 힘은 고교동창 모임 같지 않다는 속내를 털어놨다.
한국에서는 단연 고교동창 모임이 압권이라고 한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창은 너무 어리고, 대학은 사회 물맛을 조금씩 보기 때문에 결속력이 떨어진다” “예민한 사춘기에 담배를 숨어서 피기도 하고, 3년간 좁은 울타리에서 고락을 함께 한 일종의 게마인샤프트 관계와 같다”는 풀이다.
사회생활에서는 남이 듣기 거북한 얘기는 안 하는 게 보통이다. 공연히 미움을 사거나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고, 진심이 곡해되기도 하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고교동창은 다르다.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들도 끈끈한 우정을 쌓을 수 있지만, 친교 기간이 비슷할 경우 고교동창의 우정의 농도는 더 짙은 게 보통이다. ‘할 말’ ‘안 할 말’ 다 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LA 방문을 앞두고 이곳에 사는 부산상고 53회 동기동창들이 졸업 후 첫 상봉에 설레고 있다. 동포간담회에 초청돼 대통령 친구를 볼일에 들떠 있다. 건조한 생활에서 추억을 떠올리는 것은 ‘단비’와 같다. 그러나 대통령의 고교동창은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대통령과 대화할 기회가 있을 지 모르지만 기회가 닿지 않더라도 e메일, 서신 등을 이용하면 된다. 한국이 나아갈 방향과 동포사회와의 관계 등에 대해서 ‘싫은 소리’를 해야 한다. 고교동창들이 하는 비판을, 반대를 위한 반대나 근거 없는 깎아 내리기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대통령 동창에 보내는 진짜 우정이다. 대통령도 고교동창의 충언을 가슴으로 들을 것이다.
<박봉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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