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선거에서 패자란 없습니다. 우리가 지지한 후보가 당선되는 안되든,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면 우리 모두는 똑같은 미국인일 뿐입니다”
존 케리 민주당 대선 후보가 3일 패배를 인정하는 승복 연설에서 한 말이다. 지난해 9월 민주당 대선 후보 지명전 출마를 공식 선언했던 같은 자리에서 그는 치열했던 싸움의 끝을 패장으로서 맞았다. 짙푸름으로 빛나던 울창한 나무들이 욕심 없이 잎을 떨구는 늦가을, 그도 수년간 키워왔을 빛나던 꿈과 야망을 내려놓고 패자로 물러섰다.
정치체제를 암소 두 마리로 설명하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내게 암소가 두 마리 있다고 했을 때, 공산주의란 이웃이 다같이 암소를 돌보고 모두가 우유를 나눠 먹는 것, 독재정권이란 정부가 암소를 빼앗은 후 나를 쏘아 죽이는 것, 파시즘이란 정부가 암소를 차지하고 내게 사육시킨 후 그 우유를 내게 파는 것 등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란 내 암소의 우유를 누가 가질지 이웃들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케리는 패자가 된 후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얻었다. 바로 이웃들, 즉 유권자들이 최종 결정을 내린다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존중한데 따른 결과였다. 3일 케리가 예상보다 일찍 패배를 받아들이자 미 국민들은 10명중 8명 꼴로 ‘잘한 일’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의 승복 연설을 들으며 처음으로 케리라는 인물을 다시 보게 되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케리의 승복은 물론 승산이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결과였다. 하지만 인간적인 고뇌가 없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2000년 대선에서 승패를 가른 것이 플로리다의 537표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오하이오에 아직도 계산되지 않고 남은 20여만~10여만의 잠정투표가 눈앞에 어른거렸을 것이 분명하다. 재검표나 소송의 유혹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민주주의의 대통령은 유권자들이 뽑는 것이지 법정에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며 케리는 패배를 인정했다. 그의 연설 내용도 인상적이었지만 내게는 떠나가야 할 때 떠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11월이 되니 캘리포니아에서도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진다. 길가에 떨어진 나뭇잎을 주워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잎자루의 끝이 칼로 자른 듯 반듯하다. 생장호르몬의 변화에 따른 결과이다.
나무에는 옥신이라는 생장호르몬이 있어 성장을 하고 나뭇잎이 가지에 붙어있고 하는 데 날씨가 추워지면 이 호르몬이 파괴되면서 잎이 떨어진다고 한다. 떨어진 낙엽은 쌓여서 겨울 동안 뿌리를 따뜻하게 덮어주다가 썩어서 거름이 되어 새 잎의 양분이 됨으로써 생을 마친다.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때에 순응하기 때문이다. 때를 따라 싹이 돋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지며, 잎이 떨어질 뿐,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다. 떠밀려 나가는 대신 스스로 스러져 나간다. 죽어져 나가야 할 것이 그대로 붙어있겠다고 욕심을 부리면 문제가 생기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3년 전 서울대학교 연구팀은 ‘노화와 암의 원인’이라는 이론을 발표해 세계적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영국의 권위 있는 과학 잡지, 네이처에 실린 이론에 의하면 사람이 늙고 암에 걸리는 것은 죽어야할 병든 세포가 죽지를 않고 버티기 때문이다.
연구팀의 설명에 의하면 건강한 몸에서 세포는 병이 들면 스스로 자살을 함으로써 개체를 보호한다. 하지만 고령이 될수록 세포가 병든 상태에도 자살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암세포로 발전을 한다는 것이다.
전도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정한 때가 있다고 가르친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살릴 때가 있으며,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고,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우리의 삶이 분노와 원망으로 숨막히고, 회한으로 질척거리는 것은 많은 경우 때에 따라 살지를 못하는 것이 원인이다. 삶의 지평선에 찾아드는 변화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지혜가 필요하다. 케리 상원의원이 자신의 연설처럼 멋지고 담담하게 패배를 받아들였으면 한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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