랠프 네이더는 한 때 미 소비자들의 영웅이었다. 프린스턴 대를 수석 졸업하고 하버드 법대를 나온 그는 일신의 안락한 삶 대신 대기업의 횡포에 맞서 소비자 권익을 옹호하는데 헌신했다. 31살 약관의 나이에 쓴 ‘어떤 속도에도 위험한 차’(Unsafe at Any Speed)는 소비자 보호 운동의 고전이다.
그는 젊고 이상에 찬 변호사들을 모아 ‘네이더의 용사들’(Nader’s Raiders)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산업 공해, 위험한 상품, 정부의 무능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썼다. GM 간부들은 그의 약점을 잡기 위해 사립탐정을 고용했다 발각이 나자 의회 청문회에서 공개 사과하는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약자의 수호자’로서의 그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2000년 대선 때부터다. 그는 “공화당과 민주당은 돈을 보고 무릎을 꿇는 속도가 다를 뿐”이라며 녹색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리버럴 진영과 전통적인 그의 지지자들이 “출마해봤자 고어 표만 깎아 먹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만류했으나 그는 고집을 꺽지 않았다. 플로리다에서 수 만 표를 얻은 그는 수 백 표 차이로 부시가 플로리다에서 이기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2004년 대선에 그가 다시 나오자 4년 전의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던 그의 지지자 상당수는 결별을 선언했다. “소비자 운동가로 쌓은 명성을 말년의 아집으로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네이더는 자신의 청렴함과 도덕성 우월성을 내세우며 출마를 강행했다.
민주당 일각의 집요한 방해로 자신의 이름을 대통령 후보로 올리는 작업이 순탄치 않자 네이더는 공화당의 자금 지원도 사양치 않았으며 공화당원들이 그의 선거 유세를 돕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골수 네이더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이건 아닌데...”라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펜실베니아 법원은 13일 펜실베니아주 대선 후보 명단에서 네이더의 이름을 삭제했다. 그를 지지하는 유권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는 5만1,000명 중 2/3에 달하는 3만2,000명이 허위로 조작된 인물로 판명됐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제기한 이번 소송을 심리한 제임스 콜린스 판사는 “이 법원 어떤 판사보다 선거 소송을 많이 다뤘지만 이런 사기 행각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네이더가 올린 지지 유권자 이름 중에는 미키 마우스를 비롯 마음대로 조작해낸 가공의 인물 수 천명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하이오, 플로리다와 함께 이번 대선을 좌우할 주로 꼽히는 펜실베니아에서 네이더의 이름이 빠지자 민주당은 환호를 외치고 있으나 공화당은 비상이 걸렸다. 3%로 추산되는 네이더 표가 민주당으로 몰리면 현재 박빙인 판세가 뒤집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대선 판세도 판세지만 이번 유권자 명단 조작은 야심에 눈이 먼 인간이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이번 추문으로 네이더는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정치 생명도 끝났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영웅의 말로치고는 너무 비참하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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