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폰이 널리 보급되기 이전인 90년대 중반, 신문사의 한 남자 후배가 퇴근 후 당구장에 들렀다. 머리를 식힐 겸 잠깐 즐길 요량이었는데 게임에 몰두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 버렸다.
귀가하기에는 너무 늦은, 혹은 너무 이른 새벽 시간, 그는 아내의 잔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뭐라고 둘러대야 조용히 넘어갈까”- 그가 생각해낸 묘안은 타이어 펑크였다. 자동차 타이어에 양손을 비비고 셔츠를 비빈 후 집안으로 들어서며 그는 고속도로에서 타이어가 터져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온 몸과 표정으로 연기했다.
작전은 맞아 떨어져서 그는 밤늦은 취재에 타이어까지 말썽으로 부려 고생 끝에 돌아온 가장으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알리바이 만들기에 성공을 한 것이었다. 양손과 셔츠의 검정얼룩이 알리바이를 받쳐주는 소품 역할을 했다.
셀폰으로 언제 어디서든 연락이 가능한 지금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면 그는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전화를 꺼 놓는 것이 한 방법이지만, 쉽게 의심을 산다는 문제가 있다. 이럴 때 고속도로 소음이 뒷배경으로 깔린다면 완벽한 알리바이가 성립될 텐데 - 그런 필요를 느낀 사람들이 많았는지 알리바이용 배경음이 인기이다.
독일에서 개발해 선풍적 인기를 끈 ‘가짜 배경음’서비스가 영국으로까지 진출한다는 외신 보도가 있었다. 일명 ‘알리바이 서비스’에 가입하면 셀폰에 교통 혼잡음, 천둥소리, 공원의 새소리등 9가지 배경음이 제공돼 그때그때 변명에 맞게 골라 쓸 수가 있다고 한다. 집에서 느긋하게 아침식사를 하며 셀폰의 교통 혼잡음 단추를 누르면 ‘고속도로가 너무 막혀서’라는 거짓말이 힘을 얻는 것이다.
한편 한국의 배경음 서비스 수준은 그 정도가 아니다. 통화중 분위기를 잡을 수 있도록 갖가지 음악과 효과음이 다 배경음으로 설정 가능한데 그중 한 범주가 ‘알리바이 만들기’이다. 수십가지에 달하는 ‘알리바이’ 배경음 중 특히 인기가 높은 소리는 ‘비오는 거리’- 빗소리를 배경으로 촉촉한 대화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은 가보다. 그외 무드 잡기 좋은 배경음으로는 ‘새벽 바닷가에서’‘숲속에서 산책 중’등.
반면 ‘전화 통화 짜증날 때’ ‘지금 밖에 있어’ ‘야근하는 중’ ‘안 들리는 척 하고 싶을 때’ ‘업무상 접대 중’등은 다분히 거짓말의 냄새가 풍기는 항목들이다.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2,60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바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소소한 거짓말들을 밥먹듯이 한다. 절대로 거짓말을 안 한다는 사람은 단 1.5%뿐.
그러니 ‘알리바이 만들기’는 잠재 고객을 엄청나게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제는 화상 통화가 가능하니 어떻게 하나. 아마도 ‘배경 화면’이 곧 나오지 않을까.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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