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여러 공직 중 가장 실권이 없는 자리의 하나가 부통령 직이다. 초대 부통령이었던 존 애덤스는 아내 애비게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통령이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가장 별 볼일 없는 관직”이라고 한탄했다.
그럼에도 부통령 후보 선택은 대선 하이라이트의 하나다. 지금은 대통령 후보가 러닝메이트를 택하는 것이 관례화 됐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미 건국 초기에는 선거인단 표를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대통령, 다음 득표자가 부통령이 되게 돼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같은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이던 라이벌이 한 사람은 대통령, 다른 사람은 부통령으로 백악관으로 들어앉아야 했다. 정반대 생각을 갖고 있는 두 사람이 4년간 한 집에서 ‘적과의 동침’을 해야 했으니 편안한 날이 많지 않았다.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의 경우는 정파를 초월해 존경받는 인물이어서 누가 부통령을 해도 말썽이 없었으나 2대째인 애덤스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애덤스의 부통령은 정적이자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야심만만한 정치인 토머스 제퍼슨이었다. 두 인물은 사사건건 부딪쳤으며 마지막에 가서는 애덤스가 ‘국가 반란죄’를 적용, 현직 부통령을 잡아넣을 뻔한 일까지 있었다.
정파가 다른 사람이 정·부통령을 하는 제도의 폐해가 명백해지자 미국인들은 1804년 헌법을 고쳐 러닝메이트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그랬음에도 대통령과 부통령의 사이는 대체로 가깝지 않다. 상대당 후보와 같이 백악관에 입성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 친한 인물보다 당내 경쟁자를 부통령 후보로 택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마지막 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은 루즈벨트의 4선을 위해 헌신적으로 뛰었음에도 백악관에 들어와서는 찬밥 신세였다. 원자탄 개발계획이 진행중이라는 것도 루즈벨트가 죽고 나서야 알았다. 아이젠하워 또한 자신의 부통령이었던 닉슨을 불신했으며 존슨도 케네디 형제들에게 철저히 소외당했다.
부통령 직은 평소에는 별 볼 일 없는 자리지만 대통령에게 변이 생기면 졸지에 ‘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로 변신한다. 1901년 맥킨리가 취임하자마자 암살 당해 43세의 최연소 나이로 대통령직을 물려받은 시오도어 루즈벨트나 1945년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병사하자 권좌에 오른 해리 트루먼은 모두 우연히 대통령이 됐지만 중요한 업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는다.
존 케리가 마침내 러닝메이트로 존 에드워즈 상원의원을 선택했다. 젊음과 패기, 예선에서 보여준 캠페인 능력, 남부 출신이란 점등을 고려, 그가 자신의 약점을 보완해줄 최선의 인물이란 평가를 내린 듯하다. 팽팽한 접전이 예상되는 이번 대선에서 에드워즈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민경훈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