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많은 한국인 자녀를 길러낸 사람은 누구일까. 아마도 알로이시우스 슈워츠 신부가 아닐까. 워싱턴 DC 출신인 그는 1957년 27살의 나이로 사제 서품을 받자 바로 한국으로 달려갔다. 6·25 참화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당시 한국은 전쟁 고아로 우글거렸다. 슈워츠 신부가 한 일은 부모를 잃고 오갈 데 없는 이들을 먹이고 재우는 것이었다.
1964년 그가 부산에 세운 보이즈타운은 나날이 커져 이제는 프리스쿨에서 초중고등학교와 체육관을 갖춘 본격적인 교육 기관으로 성장했다. 여기 들어올 수 있는 아이들은 부모가 양육할 능력이 없는 절대 빈곤층에 한하지만 워낙 교육 수준이 높아 멀쩡한 집 부모들까지 어떻게 든 넣어 보려고 서류까지 위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가 1992년 병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수천 명의 오갈 곳 없는 한국 아동들이 이곳을 거쳐 훌륭한 성인으로 성장했다. 슈워츠 신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들은 사회 활동을 하면서도 이 학교에서 자원 봉사를 하며 그의 은혜에 보답하고 있다. 그의 10주기를 맞아서는 슈워츠 신부 동상을 세워 그의 넋을 기렸고 노무현 대통령도 당선 직후인 2002년 12월 이곳을 방문, 아이들과 기념 사진을 찍고 이를 취임 기념 우표 사진으로 사용했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세운 ‘세계 아동의 마을’(World’s Village of Children)은 이제 필리핀, 멕시코, 브라질 등 세계 각지로 뻗어나가며 현재 2만 명의 아동들에게 생명선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살아 생전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막사이사이상을 받았으며 두 차례나 노벨 평화상 후보자로 지명되기도 했다.
4대째 한국에 머물며 연세대를 세우는 등 한국의 교육과 사회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언더우드 일가가 입국 119년 만에 한국을 떠난다는 소식이다. 언더우드 일가는 1885년 언더우드 1세인 원두우(호러스 언더우드)씨가 한국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로 입국한 후 4대에 걸쳐 한국인을 위한 봉사를 해왔다.
그러나 슈워츠 신부와 언더우드 일가는 한국이 지독히도 어려웠던 시절 물질적 풍요로움과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태평양을 건너와 피부색과 인종과 언어가 다른 이방인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미국인 중 일부에 불과하다.
이제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갓 넘어선 한국인들은 스스로 경제 강국임을 자랑하기 좋아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존경받는 인간은 돈과 권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이이듯이 진짜 성숙한 나라는 고속 인터넷과 이동 통신이 잘 보급된 나라가 아니라 불쌍한 이웃 민족을 돕는 나라다. 한국에서도 슈워츠 신부나 언더우드 일가처럼 아프리카나 라틴 아메리카로 달려가 4대째 봉사를 하고 ‘고아들의 아버지’ 소리를 듣는 사람이 나오는 날 선진국민을 자부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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