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박정희의 유신 독재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시절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뉴욕타임스와 “미국 정부가 한국의 인권 개선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에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독재 정권의 하수인이던 유정회를 비롯한 여권은 발칵 뒤집어졌다. 즉각 김 총재를 “사대주의자”로 매도하고 미국에 대해서는 “국내 문제에 대한 내정 간섭을 하지 말라”고 나왔다. 그 결과 김 총재는 국회의원 직에서 제명됐으며 이것이 부마사태를 불러왔고 결국 10·26을 초래, 유신체제는 종말을 고하게 됐다.
28일 ‘북한 자유의 날’을 맞아 워싱턴 DC에서는 수십 명의 탈북자들이 정치인들을 만나 북한의 인권 침해 상황을 고발하고 미국이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해 줄 것을 호소했다. 공원에서는 탈북 음악인들이 주도한 음악회도 열리고 탈북인들의 실상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 상영, 정치범 수용소를 탈출한 사람들의 증언도 있었다. LA를 비롯 미주 각지 한인들과 미국 인권 운동가 등 수백 명은 집회를 열고 북한의 인권 보호를 촉구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이처럼 많은 탈북자들이 모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 자유의 날’ 행사는 현재 의회에 계류 중인 ‘북한 자유 법안’ 통과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다. 이 법안은 탈북자들에 대한 지원과 정착을 돕고 북한 주민들에게 외부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자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미국인들과 미국 언론은 이들 얘기를 경청했지만 한국 정부와 한국 언론의 반응은 무덤덤 하 다. 아니 무관심을 넘어 한국 집권층의 일부 세력에게 이들 움직임은 못마땅하기 짝이 없다. 지금 북한 인권을 거론하는 것은 남북 화해를 깨는 일이며 더더구나 이를 미국에서 거론하는 것은 사대주의적 발상이라는 게 이들 생각이다. 세월이 흐르고 정권이 바뀌었지만 인권과 미국에 대한 한국 집권층의 사고 방식은 변함이 없는가 보다.
60년 전 히틀러는 600만에 달하는 유대인을 학살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당시 사람들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방치했을까” 궁금해한다. 궁금해할 것 없다. 그 때도 유대인 인권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내정 간섭이며 독일과의 관계를 해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었으니까.
지금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1,000여명에 이르는 용천 폭발사고 부상자들을 돕기 위한 운동이 한창이다. 그러나 20만 명에 달하는 탈북자와 20만으로 추산되는 정치범 수용소 수감자들의 참상을 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는 희미하기만 하다.
탈북자들은 이날 워싱턴에 있는 ‘유대인 학살 뮤지엄’ 앞에서 기자 회견을 갖고 북한의 참상을 고발했다. 옛 사람을 탓하기 전 지금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의 소임을 다하고 있는지 반성해보자.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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