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든 원치 않든 세상은 변했다”며 김종필씨가 정계은퇴 선언을 했다.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며 서산에 지는 해처럼 인생을 살고 싶다”는 것이 본인의 소원이었던 모양인데 무대에서 퇴장할 때 모습이 초라하기 짝이 없고 선거에서는 민노당에 뒤떨어지는 참패를 해 하늘에 먹구름이 낀 가운데 은퇴했다.
나이 먹으면 누구나 하던 일을 근사하게 마무리짓고 물러나고 싶은 마음에 “이번에 꼭 한번만…”하고 벼르는 중에 무슨 일이 터지게 마련이다. 이렇게되면 과거 잘 이루어 놓은 업적까지 흙탕물에 잠기게 되고 스타일은 스타일대로 구기는 망신을 당하게 되는데 JP도 그 케이스에 해당한다.
김종필씨가 “세상이 변했다”고 말한 것은 매우 아이러니컬하다. 5.16쿠데타 때 “세상 변한 것 모르느냐”며 큰 소리치던 사람들에 속한다. 나는 신문사에 입사한 후 선배 기자들로부터 5.16후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는가를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그중 하나가 박정희와 김종필에 관한 에피소드다.
박정희는 군인시절 야심은 많았으나 청렴했다. 기자들에게 저녁을 산다고 하면 소주와 불고기 수준을 넘지 않았다. 그래서 기자실에서는 쩨쩨한 사람으로 통했고 술좌석에서 기자들에게 몇 번 무안도 당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5.16이 나자 박정희는 눈에 난 몇몇 기자들을 전격 구속했다. 당시 JP는 중령에 불과했지만 실세라 기자들이 동료 석방을 부탁하기 위해 찾아갔더니 “세상 변했어! 기자들도 혼 좀 나야돼!”하고 서슬 시퍼런 표정을 지으며 거들 떠 보지도 않더라는 것이다. 그때부터 기자실에서는 누가 구태의연한 짓을 하면 “세상 변했어! 지금이 어느 때라고…”라는 농담이 유행어가 되었다.
JP는 36세에 중앙정보부장을 한 사람이다. 요즘의 386세대보다 더 젊은 나이에 실권을 잡고 한국에 정보정치 시대의 막을 연 당사자다. 한때 툭하면 정보부에서 기자를 연행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고참 선배기자들은 “세상 변했어,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하면서 개탄했다. 다 JP가 뿌린 씨앗이다. JP는 ‘1980년 서울의 봄’ 때 은퇴했어야 할 사람이다. YS와 연합했다가 물먹고, DJ와 연합해 총리까지 지내고, DJ사람 빌려다가 억지로 원내 교섭단체 만든 후 옆구리 찔러 절 받는 식의 대우를 받은 것은 유신잔당 답지도 않거니와 골수보수의 자존심에도 어긋나는 처세였다. 한때 유행하던 조크처럼 “과일도 아닌데 과일가게에 앉아 있는 토마토”처럼 어색하게 두 김씨 사이에 끼어 앉아 있었던 게 JP다.
세상이 변했다. 세상이 변했다는 것은 얼굴만 바뀐 것이 아니라 체질이 바뀐 것을 의미한다. 12.12때도 세상변화가 있었지만 그것은 5.16체질의 연장이었고, 노태우 정권은 전두환 시대 얼굴들의 화장한 모습에 불과했고, YS의 문민정부도 경상도 일색이었기 때문에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하기에는 좀 약했다. 4.19도 혁명이기는 하지만 민간정부가 옷을 바꿔 입은 정권변화지 체질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세상이 변했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한국 정치판 지진은 역시 ‘5.16쿠데타’와 ‘김대중의 집권’이라고 생각된다. 노무현 정부 탄생 및 이번 선거 결과는 DJ시대의 속편이다. 보수잔당을 자칭하는 JP의 입에서 “세상이 변했다”는 말이 나오는걸 보니 세상이 정말 변하긴 변한 모양이다. ‘3김 시대의 폐막’이 아니라 불안한 ‘새 시대의 개막’이다.
이철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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