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가주 밸리에 사는 사업가 K씨는 새해를 맞아 한국의 노부모를 방문한다.
“부모님들이 연로하셔서 미국 방문이 어렵습니다. 내가 찾아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연초에 시간을 내기가 쉽지요”
그래서 31일 자정 서울행 비행기를 예약했는데, 그리고 보니 도착 날짜가 1월2일. 설날은 공중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는 “서울에 갈 때 주로 밤 비행기를 타기 때문에 새삼스런 일은 아니지만 막상 설날이 없어진다 생각하니 뭔가 도둑 맞은 기분이다”고 했다.
하루를 도둑 맞아도 억울한데 열흘쯤 공중으로 사라져 버린다면 기분이 어떨까. 16세기 로마에서는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기상천외한 공표를 했다. “10월4일 다음날은 10월15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해 로마인들은 10월4일 목요일 밤 잠자리에 들어 10월15일 금요일 아침에 일어났다. 1582년 10월5일부터 10월14일까지 열흘동안 로마에서는 출생, 사망, 사고, 범죄 등 인간사의 크고 작은 일들이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날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교황이 이런 터무니없는 공표를 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쓰던 달력이 실제 태양의 위치와 너무 안 맞았기 때문이었다. 로마가 기원전 46년부터 도입한 율리우스력은 1년을 365.25일로 잡았다. 그래서 1년을 365일로 하면서 매년 쌓이는 6시간의 여분을 처리하기 위해 4년마다 하루가 더 많은 윤년을 두었다.
그런데 몇백년 지나자 문제가 발견되었다. 부활절의 기준이 되는 춘분이 점점 앞당겨 지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4세기께 춘분은 3월22일이었지만 1582년 춘분은 3월11일이 되었다. 달력이 춘분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자 부활절을 기념하는 날이 지방마다 제 각각이니 기독교 사회에서는 큰 혼란이 아닐 수 없었다.
율리우스력의 1년은 실제 지구의 공전 시간보다 11분44초가 더 긴 것이 문제였다. 그 사소한 오차가 1600년쯤 쌓이자 열흘 정도로 커져 버렸다. 그 오차를 수정하고 조정해 새로 만든 달력이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양력인 그레고리우스력 혹은 그레고리력이다.
로마인들만 날짜를 손해본 것이 아니었다. 미국에서는 1752년 영국왕의 칙령에 따라 그레고리력을 도입하면서 9월2일 다음날이 9월14일이 되었다. 한반도에서는 1896년 1월부터 양력을 도입했지만 민간에서는 그후로도 오래도록 음력을 같이 썼기 때문에 날짜가 실종되는 이변은 경험하지 않았다.
새 달력의 겉장을 또 넘긴다. 새해에는 달력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우리 삶에 풍성한 내용들이 담겨지길 기원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권정희 미주본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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