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경 기자
성리학에서 ‘동양의 일인’이라는 칭호를 받는 퇴계 이황(1501-1570)선생은 알면서 실천하지 않은 것은 참된 앎이 아니다 라고 역설한바 있다.
지식이나 교육이 배움으로 끝남을 경계한 말일 것이다.
근대 학계에 이황 선생의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역사에 크게 선양된 점을 재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 인 것으로 기억된다.
유학을 하나의 철학으로 자리잡게 만든 철학자로 추앙 받고 있는 것이다. 한국보다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더 높은 학적 지위를 확보한 선생의 업적은 오늘날 세계적인 규모로 부흥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에 가슴 뿌듯하다.
중국 개화기의 대표적 사상가 량치차오는 ‘성인’이라 거침없이 칭했으며, 일본 학자 수고산은 ‘공자의 도는 송의 두 분에 이르러 깊이 탐구됨에 따라 비로소 찾아졌으며 그 학은 조선의 이 퇴계에게 전해져 우리나라(일본)의 산기 암재에게 전하였다’고 밝힌바 있다.
퇴계 선생을 정주에 이어 유학의 정통을 잇는 한국 유학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한 말이라 여겨진다. 당대 한/중/일 3국으로 확대하더라도 당시로서 제 1인자임을 지칭한 평가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철학에 관심이 많은 기자의 생각에도 ‘성학십도’의 제 1도 ‘태국도설’ 의 문양과 해법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가정적인 면에서는 부인과 자식을 앞세우는 불우한 삶을 살았으나 ‘성학십도’로 유학이(특히 성리학) 성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을 갖춘 학문임을 보여주는 학문의 온축(蘊蓄)을 남겼다.
그에 대한 추앙은 앎과 실천을 함께 한 성인의 생활이었기에 많은 학자들에게 연구되고 있는 것이다. 역설적인 표현으로, 앎과 실천의 일치가 그 만큼 어렵다는 뜻일 것이다. 현대식 표현을 빌리자면 ‘지혜와 지식은 다르다’ 라는 극단적 해석과 일맥 상통 한다고 보여진다. 세모의 정을 외로운 이웃과 함께 해야한다는 생각은 누구나 다 하리라 본다. 그러나 그 누구나 다 하는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임을 부인 할 수 없다. 교회나 의식 있는 몇 사람들은 금전적인 지원으로 그 역할을 대신한 듯한 인상을 느낄 수 있다.
그나마 그런 지원조차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발 앞서, 작은 정성으로 마련한 양발 한 결례를 예쁘게 포장하여 전달한 새크라멘토 한인 합창단의 양로원 방문은 단원들조차도 눈물로 얼룩진 뜻 깊은 행사였다. 작은 실천이 주는 큰 기쁨을 가슴 가득히 싣고 왔으리라 여겨진다. 기자의 손을 꼭 쥐고 놓지 않는 어느 미국노인의 눈물을 외면하지 못하고 다시 오마 약속을 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 모습은 우리 모두의 모습이었다. 함께 즐거워 하다가 떠날 움직임이 보이자 눈물부터 앞세우는 사람이 그리운 그 들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세모의 정을 이웃과 함께 한다면 한해를 보내는 빈 가슴에 사랑이 채워져 따뜻하리라 여겨진다. 훗날 우리의 외로운 모습을 위로하는 의식이래도 좋을 듯하다. 함께 더불어 살며 생각과 행동을 일치하는 기쁨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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