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기준 <경제부장>
신문사의 세밑은 바쁘다.
송년기획 준비하랴, 신년특집 짜랴, 한 해를 정리하고 또 한 해를 시작하는 작업이 동시에 벌어진다.
하루 하루의 마감생활로 세월의 단절에 익숙해졌을 법도 한데 송년 시리즈를 준비하는 이맘때가 되면 가슴속에 깊은 회한(悔恨)이 남는다. 대부분이 부끄럽고 한스러운 일 들만이 다가온다.
이민 100주년 현장에서 가혹하리 만큼 몰아붙인 기라성 같은 이민 선배들의 일그러진 모습이 하나둘씩 떠오르고 독자들의 의미 있는 항의에 궤변을 늘어놓으며 군림하려 했던 졸렬함도 가슴속을 아려온다. 불법체류 신분인 아내의 출국문제를 애절하게 물어온 한 독자의 전화를 바쁘다는 핑계로 시원하게 설명하지 못한 것도 마음에 걸린다.
모두가 회색 빛이다.
최근 고등학교 동문 망년회를 다녀 온 한 이민 선배의 하소연은 송년 세모에 느끼는 또 다른 단상이다. 또 한 해가 가는 구만. 인생을 잘못 산 것 같기도 하고 자식을 잘못 가르친 것 같기도 하고…. 딱 집어서 크게 잘못한 것은 없는데 왜 이렇게 허전하지? 이제 생각 좀 하면서 살아야겠어
자식에게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이민을 와 수십 년을 이를 악물고 개미처럼 열심히, 쉼 없이 살아 온 성공한 한 이민 선배의 넋두리다.
특별히 위로할 말도 없어 며칠이 지난 후에 이해인의 ‘작은 위로’를 건넸다.
’쓰러진 꽃들을/어떻게 위로해야할 지 몰라/하늘을 봅니다/비에 젖은 꽃들도 위로해 주시구요/아름다운 죄가 많아/가엾은 사람들도/더 많이 사랑해 주세요’
이것이 이 선배만의 넋두리는 아닐 것이다. 송년에 맞는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다.
그동안 크게 잘못 살아온 것이 없는데도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허전함을 호소하는 것은 왜일까. 생활의 풍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풍요다. 정신적인 풍요는 나눔과 베풂, 봉사에서 나온다. 1년에 수백만 달러를 벌면서도 기부라곤 동창회비 100달러가 고작이라면 결코 잘 살아온 것은 아니다. 정신적으로 빈곤할 수밖에 없다.
한 한인 기업인이 유명한 LA 컨트리클럽에 회원가입 신청을 냈다가 마지막 문턱에서 가입이 거절된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미국에선 유명 사교클럽이나 골프클럽에 가입하기가 참 어렵다. 회원자격이 너무 까다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클럽의 회원이냐에 따라 그 사람의 지명도를 가늠하기도 한다.
106년 역사의 LA 컨트리클럽은 그 명성에 걸맞게 클럽 멤버가 되기가 어렵다. 이 클럽의 고위관계자와 친분이 있었던 이 한인 기업인은 클럽 관계자의 주선과 도움으로 가입신청을 냈다. 순조롭게 몇 단계의 심사를 통과하다가 마지막에서 걸리고 말았다. 이유는 ‘사회봉사와 기부 기록이 없다’는 것.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그러나 어쩌면 잘못 살아온 것 같은 과거에 집착할 필요도 없고 미래를 불안해 할 필요도 없다. 고개를 돌리면 보람 있는 일들이 수없이 많다. 세모엔 더 많다. 문화재단, 어린이 재단, 박물관, 비영리 스포츠 재단, 장애재단, 공공안전 등등.
주류사회에 코리안-아메리칸의 이름도 빛내고 세금혜택도 받고 이 땅의 주인으로서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 세금 내는 것으로 할 일 다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제야의 종소리가 들려올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송년을 준비하면서 한번쯤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아갈 지 생각해 보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