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상/수필가
선운사-하고 소리내면 입안으로 녹차 맛이 번진다. 중학 친구들과의 남도여행은 내내 화창한 날씨였다. 선운사 외곽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우리도 조금은 지쳐 있었고 창밖엔 늦가을 부슬비가 속울음처럼 내렸다. 다음날 이른 아침, 왠지 숙연한 마음으로 빗 길을 걸으려고 선운사 입구에 왔더니, 분명 차량 입장은 금지인데 매표소 양반, 간밤에 기분 좋은 일이 있었는지, 비도 오는데 산 중턱 도솔암까지 차를 타고 가라고 선심을 쓴다.
그 바람에 울창한 전나무들 사이에 잎이 진 뒤에야 꽃이 피는 작은 나무를 놓쳐 버렸다.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하는 사연 때문에 눈물처럼 빗물이 내린다. 소문으로만 듣던 파이갈호의 쪽빛 물을 노래한 시인도 있고, 물푸레나무를 한번도 본적이 없는 시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깔이 물에 잠긴 나뭇잎 파르스름함이라고 믿는 것처럼, 나는 이름도 모르는 그 꽃이 가장 슬프고 아름다울 거라고 믿어버린다.
도솔암의 찻집 벽에 걸린 사연도, 꽃나무 못지 않게 가슴 아팠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도솔암자 아래 차를 세우고 옆길을 오르면, 높이 40미터 암벽에 새긴 거대한 여래상이 두 손 합장도 잊은 체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은 치켜 뜨고는, 네 놈이지! 그런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누가 여래상 머리 위에 여러 개 구멍을 내고 닫집을 부서Em린 때문인가 보다. 내 친구는 암각 여래상의 배꼽 근방에 네모난 감실을 가리키면서, 1820년 전라도 감찰사 이서구가 그 안에서 비결책을 꺼내려하자 뇌성 병력이 일어나 다시 넣었는데 첫 장에는 놀랍게도 전라도 감사 이서구가 열어 본다라고 쓰여 있었단다. 부연하면 그 후 벼락살이 사라졌으니 한 무리가 석불의 감실을 부수고 비결책을 가지고 도망간 흔적이란다. 속세에서 이곳까지 찾아와 해코지한 사람들 때문에 그 후손들을 보고도 여래상은 아직도 화가 치미는 가보다. 산 속엔 아직 물들지 않은 단풍잎들이 활짝 편 아기들 손바닥처럼 세상을 푸르게 장식했으며 선운사로 내려오는 길 내내 때묻지 않은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 버렸다.
비 개인 선운사로 들어서는 길목은 하늘도 땅도 노란 은행잎 천지였다. 자연은 바라볼수록 마음까지 맑게 해 준다. 자연은 넘칠수록 건강하고 아름답지만 사람은 많을수록 공해 되고 파괴된다. 사람들은 자연처럼 순리와 질서대로 살지 않고 욕심으로 뭉쳐졌기 때문인가 보다. 선운사를 찾으려면 4월말에서 5월초가 최고라고 한다. 경내를 붉게 물들인 동백꽃 때문이다. 그러나 <선운사 동백꽃을/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 했고> 초봄을 노래한 서정주 시처럼, 10월의 운치도 만만치 않다.
우선 널따란 마당에 비는 개고 인적 없는 적막함이란, 뒷산의 동백나무 푸른 물결은 천연기념물답게 산에 이는 파도였다. 동백 대신 색색으로 물든 수림이 담장을 치고, 마당 가운데 감나무는 박수근의 그림 속 아낙네처럼 불경소리에 무르익은 감들을 수북히 머리에 이고 서있었다. 지붕이 절집 높이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내려 누르는 바람에 지붕허리가 소등처럼 휘었다. 우리를 대신 수행하는 모습이다.
서울로 돌아온 후에는 한달 동안 목마른 사람처럼 거리를 헤매었지만 25년 전 내가 알던 사람은 하나도 못 보았다. 그런데 인사동 그림 집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샌프란시스코 이웃 K씨라니, 그분은 요즈음 한창 매스컴을 타는 동자승 화가 원성 스님을 내게 소개했다.
스님에게서 녹차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반가웠다. 선운사 이야기를 꺼냈더니 소감을 묻는다. 숲길의 고압 전선주가 옥에 티였어요. 그는 선운사 풍경처럼 맑게 웃었다. 그가 세속의 인기에 편승하여 빛 바래지 않기를 기원하며 모처럼 나도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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