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6월 17일 전직 CIA 요원을 포함한 5명이 워싱턴 DC 워터게이트 아파트 단지의 민주당 본부에 침입했다 붙잡혔다. 그 해 9월 연방 대배심은 이들과 전직 백악관 보좌관 고든 리디 등을 주거 침입죄로 기소했지만 이 사건은 일반의 별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닉슨이 직접 간여돼 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한다. ‘토요일 밤의 학살’이란 이름이 붙은 1973년 10월 20일 엘리옷 리처드슨 법무장관은 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를 파면하라는 닉슨의 명을 거부하고 사임하며 윌리엄 러클스하우스 부장관 또한 닉슨의 명을 거부하고 사임한다. 콕스를 파면하는 일은 결국 로버트 보크 차관의 몫이 된다. 보크는 훗날 레이건에 의해 대법관에 지명되지만 의회의 인준을 받지 못한다.
닉슨은 콕스를 파면하는데는 성공하지만 이로 인해 대통령직 수행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의회가 8개 건의 탄핵 안을 상정하자 닉슨은 이에 굴복, 18분간 녹음 내용이 지워진 백악관 테입을 내놓아야 했다. 그랬음에도 하원 법사위원회가 워터게이트 수사를 방해하고 제대로 된 테입을 내놓지 않았다는 이유로 3개항의 탄핵 안을 가결시키자 닉슨은 1974년 8월 8일 1억 명의 시청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임을 발표해야 했다.
닉슨의 사임과 함께 특별검사의 인기는 상종가로 치솟았으며 1978년 의회는 대통령이 특별검사를 파면하지 못하도록 특별 검사법을 만들어 임명권자를 법무장관에서 판사들로 구성된 위원회로 넘겼다. 이 제도는 그 후 레이건의 이란 콘트라 스캔들과 클린턴의 화이트워터 및 르윈스키 스캔들을 조사하는데 사용됐지만 정쟁의 도구로 쓰이는 등 폐단이 많다는 이유로 현재는 폐기된 상태다.
한국 정국이 특별 검사를 둘러싼 정쟁으로 북새통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자 한나라 당에서는 전원 의원직을 내놓고 단식투쟁 등 결사 항전을 외치고 있다. 이 와중에서 이라크 파병 등 중요 사안은 물론 미주 한인들의 주 관심사인 재외 동포법 개정안과 재소자 이송법안 등은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사장될 위기에 놓여 있다.
대통령의 지시를 거부하고 법무장관이 사임할 수 있는 나라에서는 대통령 측근 비리도 검찰이 공정히 수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실정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를 구차한 이유를 들어 거부한 대통령도 문제지만 헌법에 보장된 거부권 행사를 ‘민주주의에 대한 폭거’로 규정하고 무한 투쟁에 들어간 한나라당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 재의결에 충분한 표 차로 통과시켰으면 다시 재의결하면 그만이다.
이런 순리를 무시하고 생으로 문제를 만드는 것은 자신들의 정치 비자금 스캔들을 덮고 노 대통령을 상대로 정치 공세를 펴 내년 총선에서 유리한 고지에 서겠다는 술수에 불과하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하루 빨리 이성을 찾고 산적한 민생 법안 처리 등 국사에 전념하기를 기원한다.
<민경훈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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