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1월22일 오픈카를 타고 달라스 시내를 질주하던 케네디 대통령은 암살범이 쏜 총에 맞아 즉사했다. 50대 이상 미국인들의 뇌리 속에는 40년 전 일어난 사건이 어제 일 같이 생생하게 박혀 있다.
케네디 암살 사건은 역사상 가장 샅샅이 파헤쳐진 살인 사건이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케네디 암살의 진범이 누구인가는 아직도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소집된 워런위원회는 1964년 수개월에 걸친 광범위한 수사 끝에 이는 리 하비 오스월드의 단독범행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공식 발표 이후에도 범행의 배후에는 CIA와 마피아가 개입돼 있다는 설, 심지어는 존슨 부통령이 연루돼 있다는 설 등 온갖 루머가 난무했다. 1991년 나온 올리버 스톤 작 ‘JFK’는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대표적 영화의 하나다.
숱한 음모론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대한 대다수 전문가들의 견해는 단독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던 잭 루비가 왜 오스월드를 죽였는지 등 의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40년이 지나도록 음모론을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1992년에도 의회는 수천 장의 비밀 문서를 공개하고 수많은 전문가를 동원, 다시 진상을 규명했지만 단독범행 이외의 다른 음모론을 지지할 만한 어떤 증거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이를 신봉하는 것은 정신이 좀 이상하고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별 볼 일 없는 전직 해병대원이 전 세계 자유진영의 지도자를 그토록 쉽게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누가 케네디를 죽였는가에 관계없이 케네디 암살은 미국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존슨은 케네디 동정표에 힘입어 1964년 선거에서 압승, 이를 바탕으로 민권법과 유권자 등록법을 통과시키고 메디케어를 포함한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을 추진할 수 있었다. 반면 존슨은 케네디가 시작한 월남전 개입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케네디 정책에 대한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힐까 두려운 나머지 월남의 늪에 발을 깊숙이 내딛고 말았다.
43세라는 미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대통령으로 선출된 케네디는 그 후 불과 3년 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짧은 재임기간에도 불구, ‘돼지만 공격 사건’ ‘베를린 장벽 위기’ ‘쿠바 미사일 사건’ ‘민권 운동’ 등 중요한 이슈와 씨름했다. 또 화려한 외양과는 달리 대장염과 에디슨 병, 척추질환 등 수많은 질병에 시달렸으며 이로 인해 3번이나 죽음을 앞둔 고해성사를 받은 것으로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다.
그의 유해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퍼스트 레이디였던 재클린과 함께 안장돼 있지만 그의 업적과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그의 암살을 둘러싼 미스터리처럼 앞으로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으로 남을 것이다.
<민경훈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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