몹시도 무덥던 어느 날 조카딸의 성화에 못 이겨 홈디포에 가서 화분에 심겨진 오렌지나무 한 그루를 사왔다. 문제는 그 날부터 시작되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며 도대체 오렌지는 언제 열리는 거야? 성화를 부린다. 분명 시간이 흘러야 열매가 맺힐 것을 모르지 않을텐데 아무리 얘길 해도 보채기를 그치지 않는다. 어이없어 하다가 내 모습을 돌아본다.
지난 봄 고추와 토마토 모종을 사다 심어놓고 나도 똑같은 심정이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키가 쑥쑥 자라고 잎은 무성해지는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 때가 되지 않아 그런 줄 잘 알면서도 얘들아, 이 나무 병들었나봐 여보, 우리가 나무를 잘못 사왔나 봐요 되지도 않는 타박을 수없이 했다. 그러다 제풀에 지쳐 ‘에이, 지가 나오고 싶을 때가 되면 나오겠지’하고 열매 확인작업을 아예 포기하고 열심히 돌보는 재미로 위안을 삼으며 며칠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출근하려고 집을 나서던 조카가 이모, 이모, 열렸어. 열렸어. 나와봐. 빨리 빨리- 야단스럽게 불러댄다. 쟤가 갑자기 왜 저래. 열리긴 뭐가 열려? 시큰둥한 대답이 답답한지 더 큰 소리로 외쳐댄다. 아휴, 답답해. 고추도 열리고 토마토도 열렸어. 빨리 나와보라니까-
설거지를 하다말고 젖은 손을 털며 뛰어나갔다. 정말이다. 놀랍고 신기했다. 안달하며 기다리던 마음을 놀리기라도 하려는 듯 다닥다닥 많이도 열렸다. 알알이 빨갛게 물들어 가는 열매들을 바라보며 그때 일을 생각하면 멋쩍은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 여름날 급한 마음에 열매 보기를 포기하고 돌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할수록 민망해 진다. 그러면서 문득 ‘나를 바라보는 하나님과 남편과 아이와 이웃들의 심정은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 또 봐도, 앞으로 봐도 뒤로 봐도, 위로 보고 뒤집어 봐도, 그리고 몇 번을 다시 봐도 매일 잎만 무성할 뿐 열매가 보이지 않는 나로 인하여 모두들 얼마나 애가 탈까? 얼마나 안타까울까? 얼마나 아플까? 얼마나 속이 상할까? 더할 수 없는 사랑과 정성을 베풀며 기대하고 기다릴텐데…
진짜로 가망이 없어 뵈는데도,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눈곱만한 이유라도 스스로 만들어서 예뻐해 주고, 세워주고, 참아주는 모두의 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목이 메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내가 원하는 시간에 열매를 보여주지 않는 것이 속상해서 불평하며 기다려 주지 못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르고, 그래서 당연한 열매를 맺을 수도 볼 수도 없었던 많은 경우들을 돌아보았다.
요즘 나는 더 이상 하나님과 이웃을 기만하는 잎만 무성한 나무로 있지 않기를, 그리고 누구든, 어떤 일이든 서두르지도 포기하지도 말고 인내하고 사랑하며 기다리기로 다짐하며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잊지 않는다. 그리고 별걸 다 가지고 사람을 웃기고 울리시는 참 재미있으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모두에게서 결국은 맺혀질 탐스럽고 풍성한 열매를 바라본다. 믿음 안에서.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