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샌호제에 산다는 독자 한 분이 편지를 보내오셨다. 평범한 내용이지만 많은 주부들이 공감할 것 같아 공개하기로 하였다. 그분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으므로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신문에 난 Food 란을 보다가 문득 애들을 키우며 지나온 지난 20년이 생각나 펜을 들어봅니다. 요리공부 하나도 안하고 편안하게 학교만 다니다가 결혼해 그 순간부터 지금 이 시간까지 눈코 뜰새 없이 살아왔지요. Food 란에 소개되는 이야기를 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릴 날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해보고,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중에도 네식구의 식성이 각각 틀려 네사람의 저녁식사를 차리느라 분주했던 시절이 생각나서 웃음도 나옵니다.
두딸은 생김새가 틀리듯이 식성도 달라 큰딸은 한국음식을 싫어하고 미국음식을 좋아하고, 작은딸은 한국음식을 좋아하지만 맵거나 자극성이 있는 것은 못 먹고, 남편과 나는 다행히 맵고 짠 한국음식으로 통일하였지만 불행히도 남편은 돼지고기만 좋아하고 쇠고기는 손대지 않는데 나는 또 돼지고기는 못 먹고...
그리하여 저녁상을 차리려고 하면 큰딸 것은 스파게티나 파스타 같은 것을 부지런히 준비하여 놓고, 그날의 메인 요리를 할 때 찌개나 국을 만들어서 매운 양념을 하기 전에 작은딸 것을 만들고, 그 다음 우리 차례에서는 아빠의 식성대로 얼큰한 돼지고기 요리를 차려낸 다음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오면 돼지고기가 안 보일 때까지 요리조리 낚시질을 하곤 했었지요.
이렇게 식사 때마다 훌륭하지도 못한 솜씨로 주방을 휘젓고 다닐 때면 결혼도 후회해보고 언제나 이 부엌과의 전쟁에서 헤어날 수 있을까 하고 괴로운 심정을 달래보던 것이 엊그제인데 이제는 정말 아쉬운 마음으로 가득 찼어요.
큰딸은 벌써 대학교 3학년, UC데이비스에서 아파트 생활을 하고, 작은딸은 고등학교 3학년, 거짓말같이 큰딸의 대학 입학과 동시에 그렇게도 복잡하던 저녁시간이 너무 수월해지더군요.
큰딸의 부재는 이제는 꼭 네식구 모두가 모여서 먹어야한다는 정신적 의무감에서 해방되면서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했죠. 슬슬 take out food로 대처도 해가면서 요령을 피우게 되면서 조금씩 아쉬운 마음도 들기 시작했어요.
이제 일년만 지나면 작은딸마저 대학으로 가고 남편이 가끔씩 골프 저녁을 먹고 들어오면 나는 이제 나만의 저녁을 만들어야 할까 하는 ‘고독한 고민’을 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요즘 제가 가장 행복해하는 것 중 하나는 큰딸이 친구들에게 배운 각종 외국음식을 집에 올 때마다 만들어 시식 시켜준다는 것입니다. 딸이 없었으면 생전 보지도 못하고 먹어보지도 못했을 음식들을 먹어보는 즐거움, 아무도 모를거예요. 둘째딸 걱정도 슬슬 접어봅니다. 한국음식을 좋아하던 딸은 LA로 학교가 정해졌다면서 맛있는 음식들을 골고루 먹어볼 기회가 생겼다고 좋아하고 있어요.
그래요. 매일 먹으면서 또 매일 무엇을 먹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엄마들의 고민을 보면서, 그래도 지나고 보면 그것은 ‘행복한 고민’이었음을 알리고 싶습니다
지금 내가 거의 매일 치르는 이 난리가 행복한 고민이 될 것이라며 이 분은 편지를 맺고 있다.
정말 그럴까? 내게도 그런 날이 올까? 난 정말로 안 그럴거 같은데…
너무도 집안 일에서 해방되고 싶어 몸부림치던 어느날 아들을 붙잡고 세뇌공작을 한 적이 있다. 원겸아. 좋은 대학은 다 멀리 있단다. 동부에 주로 몰려 있고 캘리포니아에서는 북쪽에 많이 있지. 넌 물론 좋은 대학에 가야겠지?
그때 아들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엄마, 난 여기가 좋아. 집에서 다닐거야라는 한마디로 나의 꿈을 무참히 짓밟았다. 아무리 어렸을 때 한 말이지만 아들의 성격으로 보아 난 그 말이 거의 현실이 될 것임을 알고 있다. 설사 아들이 간다해도 남편이 남으면 말짱 꽝 아닌가.
나는 빨리 고독한 고민을 하고 싶다. 아니, 밥을 안 하면 정말 고독한지 행복한지 알 수 있도록 하루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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