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으로 이뤄진 나라답게 미국은 이민자에 관대하다. 불법 체류자건 방문객이건 미국에서 아이를 낳기만 하면 그 아이는 미국 시민권자가 된다. 미국에 이민 와 나중에 시민권자가 된 사람도 단 한가지만 빼고는 토종 시민권자와 차이가 없다. 대통령 출마 자격이 그것이다.
1787년 연방 헌법이 제정됐을 당시만 해도 미국은 세계 유일의 수퍼파워가 아니었다. 가까스로 영국과의 독립 전쟁에서 이기기는 했으나 유럽 열강에 비하면 형편없는 약소국이었다. 플로리다를 비롯한 서남부 지역은 스페인, 루이지애나 등 남부는 프랑스, 캐나다를 포함한 북부는 영국 손에 들어가 있었으며 언제 이들로부터 침략을 당할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실제로 1812년 일어난 영미 전쟁 때는 영국군이 수도로 쳐들어와 백악관이 불타고 당시 대통령이던 매디슨은 야반도주를 해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인이 시민권자가 돼 미국 대통령까지 한다면 나라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느낀 헌법 제안자들이 대통령 자격을 토박이 미국인으로 제한한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 후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를 고집하고 있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이번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가주 지사 당선을 계기로 이민 1세도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헌법을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 주 워싱턴 포스트는 이례적으로 이를 지지하는 사설을 썼고 연방 의회에서도 최근 헌법 개정안이 올라와 있다. 상원에서 이를 제안한 사람은 법사 위원장으로 공화당 중진인 오린 해치고 하원에서는 대표적 리버럴인 바니 프랭크(민)와 우파이자 이번 리콜을 주도한 대럴 아이사(공)가 공동 발의했다.
그렇다고 물론 당장 이것이 통과될 것 같지는 않다. 미국 헌법은 세계에서 가장 고치기 힘든 법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헌법을 수정하려면 연방 상 하원 2/3의 동의와 50개 주 중 3/4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제헌 의회를 통해 하려면 주 의회 2/3의 지지와 제헌 의회 참석자 3/4의 동의가 있어야 된다. 지난 200여 년 간 수천 건의 수정안이 나왔지만 통과된 것은 27건뿐이라는 사실이 헌법 수정의 지난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민 1세 중 뜨는 스타로 공화당에 슈워제네거가 있다면 민주당에는 캐나다 태생의 제니퍼 그랜홈(43)이 있다. 작년 미시건 주지사로 당선된 그랜홈은 하버드와 버클리를 나오고 30대에 주 검찰총장이 된 재원일 뿐 아니라 ‘카리스마 있는 대통령 감’이란 평을 듣고 있다. 이민자가 상원의원과 주지사가 될 수 있다면 대통령은 못하란 법도 없다(사실은 있지만).
미국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가의 하나인 러시아 출신의 아인 랜드는 미 건국 이념의 위대성을 설명하다 미국에서 태어나지도 않은 당신이 뭘 안다고 떠드느냐는 공박을 받고 나는 미국인이 되기를 스스로 선택했지만 당신은 태어난 것말고 뭐 한 것이 있느냐고 반격했다는 일화가 있다. 재능 있는 이민자의 백악관 입성을 막는 구시대적 법은 사라질 때가 됐다.
<민경훈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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