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첫 정은 가슴에 묻어둔다고 한다. 평생 못잊는 법이라고 한다. 어려서 백지같이 순수한 마음에 깊이 와 닿은 첫 정은 늘 애틋하게 남아있다는 것이다. 비단 이성간의 첫 정만 그럴까.
뉴욕으로 이민의 첫 발을 디딘 많은 한인들이 타주로 여행을 가거나 잠시 머물렀다가 뉴욕으로 돌아오면 비로소 집에 온 안정감을 느낀다고 한다. 어딜 가도 뉴욕만한 곳이 없다는 것이다. 뉴욕에 살다가 업무상 혹은 개인적 이유로 타주로 이사간 사람들도 살던 뉴욕의 곳곳이, 기후조차 그립다고들 한다.
내가 가는 단골집은 거의 정해져 있다.14년째 살고있는 집에서 두 블럭 사이에 작은 한인상가가 형성돼 있다.델리가 세 군데 있지만 십년 이상 한곳만 드나든다. 한밤중에 아기 기저귀가 떨어졌거나 우유가 필요할 때 슬리퍼 끌고 가서 사올 정도로 가깝게 있어 요긴하기 짝이 없었다. 나중에 주인이 바뀌기도 했다. 한번은 여성필수품인 생리대가 진열장에 하나도 없었다. 알고 보니 새 주인이 한인 총각이라서 필요성을 모르는 탓이었다.
다양한 종류를 설명해주며 편의점 구색을 맞추도록 권하기도 했다. 일단 필요한 물건이 없으면 다른 곳으로 단골을 바꿀만도 한데 한번 준 정이 좀체 바뀌질 않았다.
비디오 가게도 마찬가지인 것이 원래 미국 비디오 가게였다가 한인 비디오 가게로 바뀌면서 시작된 단골이 그곳만 가고 있다. 바로 길 건너에 더 넓고 환한 비디오 가게가 생겨도 그곳으로 가면 괜히 배신자 같은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그외 세탁소, 미용실, 반찬가게 등도 마찬가지다.
하다못해 1년에 한 번 가는 휴양지의 숙소도 똑같다. 미국에 온 첫 해에 처음 가보고 한눈에 들어온 숲과 호수에 마음을 빼앗겨 그 지역에 가면 십년 이상 그 리조트 호텔만 가고있다. 올해는 다른 곳으로 가보자 하면서도 좀체 다른 곳으로 가지 않게 된다. 좀 새로운 곳을 가보자고 결심해도 그만큼 편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주인이 바뀌면서 정상영업이 이뤄지기까지 불평과 짜증이 날 때도 있지만 차차 자리를 잡는 것을 보면 고객의 마음도 흐뭇해진다.그러고보면 주인이 알아주지도 않는 고객의 의리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오랜 단골
은 기다려줄 줄 안다. 다소 불편한 점은 넘어가는 것이다.이처럼 첫 정은 편하고 익숙하여 좀처럼 변할 수도 잊힐 수도 없는 것이다.
9월25일로 뉴욕 한국일보 창간 36주년이 되었다.
미주 최초의 한인 언론으로서 한인 사회 발전을 위해 36년간 독자와 함께 성장해 왔다.수많은 구독자가 있지만 놀라운 것은 초창기 시절의 구독자가 30년 이상이 지나도 그대로 한국일보 독자라는 것이다.그 중에는 한국에서부터 한국일보를 보던 독자, 이민 1세대인 부모가 보는 한국일보를 어깨너머로 보다가 1.5세, 2세가 가정을 가지면서 대를 이어 구독자가 된 예가 상당수라는 점이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오래 전부터 봐오던 신문을 다른 것으로 바꾸기란 쉽지 않다고. 늘 잘 할 수는 없으니까 잠시 주춤거릴 때도 있겠지만 진정 신문을 사랑하는 독자는 기다려줄 줄도 안다. 그리고 따끔한 충고도 해줄 줄 안다. 이처럼 한국일보의 오늘이 있는 것은 초창기 독자가 지금 독자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이민 오고자 하는 한국인들이 줄지어 있고 이곳에서 태어난 2세들에게 한국말과 글을 가르치려는 부모가 대부분인 요즈음, 한글 신문의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신문 잘 보았다, 좋은 기사를 읽고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격려하는 독자의 전화는 늘 우리를, 나를 긴장되게 한다. 소명의식을 갖고 신문을 경건히 대하게 만든다.웬만해서는 잊혀지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첫 정은 그래서 무섭다고도 하나보다. (한국일보와 독자와의 이 첫 정,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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