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수를 지낸 한 한인은 사석에서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한 대북 송금 스캔들로 전국이 시끄러운 것을 보고는 수그러들지 않는 권력 남용에 혀를 찼다. 그는 1980년대 한국에서 지인들과 골프를 치면서 들은 이야기가 작금의 스캔들과 중첩되면서 답답함을 느꼈다고 했다.
“비교적 큰 도시에서 은행지점장, 사업하는 친구 등 몇몇이 골프를 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같이 골프를 친 은행지점장은 지방이라고 하지만 대형 은행의 지점장이었다. 이 지점장은 청와대에서 나왔다고 하는 사람이 대통령의 직인이 찍힌 징표를 들이밀며 돈을 내라고 했다고 전했다.”
이 한인은 “지점장은 정권유지에 필요해서인지 거액을 어떻게 해서든 마련하라고 반 협박하는 통에 돈을 긁어모아 주었고 그 뒤 약 한 달 간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고 했다”며 이 같은 ‘공갈 협박’은 이 지점장 뿐 아니라 다른 지점장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고 전했다.
말도 안 되는 작태이지만 서슬 퍼런 시절에 그것도 권력의 핵심을 들먹이며 던지는 ‘지시’에 일개 은행지점장이 목이 열 개라도 딴죽을 걸 형편이 아니었다. 청와대를 사칭한 간 큰 사기꾼들이 쇠고랑을 찼다는 기사가 간혹 신문지상을 장식하곤 하던 때였지만 대통령 직인이 찍힌 징표를 보여주면서 말을 건네는데 진위를 가릴 엄두가 나질 않았을 게다.
문제는 이 돈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는 것이다. 풀 빵 찍어내듯, 한국은행에 부탁해 새 돈을 원하는 만큼 마구 찍어낸 것도 아니고 은행지점장이 자기 집, 자동차, 세간을 팔아 종자돈을 준비한 것은 더 더욱 아닐 것이다. 은행 부실, 공적자금 투입, 혈세 낭비, 국민 부담 가중 등 악순환의 씨앗이 배태되는 순간 순간들이다. 총 칼만 안 들었지 ‘날강도’와 다름없었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뀔 정도로 세월이 흘렀는데 ‘그 짓’은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정상회담과 관련해 북한에 1억 달러를 지원키로 해 놓고 재원을 확보하는 데 애로가 생기자 당시 실세였던 문화관광부장관이 산업은행에 대출압력을 넣은 사실이 특검 수사발표문에 기록돼 있으니 관련자들은 더 이상 빼도 박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긴장을 완화하고 교류를 활성화하려 했다는 목적이 고귀하다 해도 이를 위해 권력을 무신경하게 휘둘러 댄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지겹게 들어온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금언을 깜빡한 것인지, 아니면 ‘권력은 모든 길로 통한다’는 뒤틀린 사고에 젖은 탓인지 모르지만 부끄러운 일임엔 틀림없다.
그나마 80년대의 ‘날강도들’이 버젓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 데 반해 이번에는 스캔들 관련자들이 법의 단죄를 받고 있다는 현실만으로 아쉬운 대로 위안을 삼아야 하는 것인지 착잡할 따름이다. <박봉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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