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 9월22일 제임스 베이커 재무장관은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의 외무장관을 뉴욕 맨해튼 플라자호텔 2층에 불러들였다. 극비리에 진행된 선진 5개국 회의에서 엄청난 뉴스가 터져 나왔다. 미국의 달러를 절하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미국 경제는 재정 적자와 무역적자의 이른바 쌍둥이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고 일본과 독일은 초유의 호황을 구가하며 미국을 조롱하고 있었다. 그 날 회의에서 베이커 장관은 달러를 절하하겠다고 통보했고 다른 4개국 재무장관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는 후문이다.
회담 후 5개국 공동합의라는 형식의 성명서가 나왔지만 실제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달러 절하를 강요한 것이다.
달러는 플라자 합의 직전에 1달러당 240엔이었지만 95년에 80엔까지 떨어졌다. 일본 엔화가 강세로 돌아서면서 일본 돈은 무서운 속도로 미국을 잠식했다. 하와이는 거의 일본 땅처럼 되어버렸고 일본 자본은 미국의 자존심이라던 컬럼비아 영화사는 물론 뉴욕의 록펠러 센터, 캘리포니아의 골프장을 사들였다.
엔화 강세는 일본의 거품을 가속화시켰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어오르던 일본 니케이 지수는 1989년 말 4만 포인트까지 올랐고, 동경 땅값이 미국 전체 땅값보다 비싸다는 계산이 나왔다. 일본의 어느 기업인은 1억 달러가 넘는 반 고흐의 그림을 사서 집에 걸어 두었다. 그러나 일본 경제의 병은 속으로 깊어갔다. 엔화가 강세이니, 수출 경쟁력을 잃게 됐고 제조업이 해외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른바 제조업 공동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죽어가던 크라이슬러마저 달러 하락의 덕분으로 살아났고 미국 제조업은 경쟁력을 회복했다. 90년대 미국의 장기 호황은 바로 달러 절하로 그 토대가 형성됐다고 할 수 있다. 85년 플라자 합의는 미국 경제를 부흥시키고 일본을 몰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최근 또다시 달러가 절하되고 있다. 이번엔 플라자 합의와 같은 강제성은 없지만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과 존 스노우 재무장관 등 미국의 경제 수뇌들이 고도의 계산된 발언으로 국제 외환 시장을 움직여 나가고 있다. 달러는 1년 사이에 유럽 12개국 공동통화인 유로에 대해 무려 25%나 절하됐다. 그 결과는 유럽의 침체다.
미국 경제는 2000년 이후 4년째 슬럼프에 빠져 있다. 미국은 2001년에 11차례에 걸쳐 공격적인 금리 인하를 단행, 은행간 콜금리를 6.5%에서 1%대로 떨어뜨렸지만 경제를 살리지 못했다. 금리 정책이 먹히지 않자 미국 정부는 대대적인 감세 정책을 썼지만 그것마저 소용 없었다. 이제 미국은 환율 정책으로 경제 회복의 돌파구를 찾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환율 정책이 다른 나라를 가난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헤지펀드의 대부 격인 퀀텀 펀드의 조지 소로스 회장은 “달러 절하는 인접국을 궁핍화하는 잘못된 정책”이라고 비판했듯이 미국은 어느 한 나라를 누르고 먼저 경제를 회복시키는 전략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타깃은 어디일까. 85년 플라자 합의는 일본을 죽였지만 지금의 달러 절하로 가장 큰 타격을 받고 있는 나라는 독일과 프랑스다.
이라크 전쟁에 반대했던 이 두 나라는 유로라는 단일통화로 달러에 대항하지만 유로가 강세로 전환되면서 벌써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독일은 5년째 경기 둔화에 시달리고 실업률이 10%를 넘어서 있다.
독일은 금리를 내리고 재정 정책을 써야 하는데도 유럽 공동체는 가맹국이 일방적으로 금리를 내리거나 재정적자를 낼 수 없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마저 불가능하다. 벌써부터 독일은 15년째 불황에 시달리고 있는 일본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국제 금융시장과 이를 뒤에서 움직이는 미국의 무서운 힘을 본다.
김인영 서울 경제 뉴욕 특파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