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방영된 이라크 전쟁의 참상에서 보았듯이, 전장에서의 살상행위에서는 선악, 남녀, 종교, 인종, 정의, 인권, 법 등등의 이슈가 고려되지 않는다. 적군에는 총탄 혹은 폭탄세례를 퍼붓는다. 전장에서 적용되는 척도는 "우군이냐 적군이냐?" 뿐이다.
전쟁이 끝나고도 전시체제의 발상이 연장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냐 남이냐"는 척도이다. 이런 경향은 한국문화에서 강한 것 같다. 내우외환으로 반만년을 시달려온 때문인지 전시체제 발상인 "아군이냐 적군이냐"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우리냐 남이냐"의 관점에서 세상사를 판단하는 고정관념이 생긴 것 같다. 공과 사의 구분보다는 ‘우리’ 혹은 ‘남’의 구별로서 세상사를 분별하며 살기 때문에, 공공의식이나 법 준수, 공공질서 준수의 성향보다는 우리끼리 봐주는 자세가 강하다. 물자 수송대란을 일으킨 모국 운수업체의 불법 교통방해에도 법을 집행할 사람이나, 지켜야 할 사람들이나 모두 법질서에 대한 관심보다는 대통령, 국민이 우리 쪽인가 아닌가에만, 혹은 왜 그리도 극단적이어야 했던가에 더 관심이 쏠리는 것 같다.
’우리’라는 단어는 ‘나’라는 대명사의 복수형이라기보다는 여럿의 ‘나’가 의리와 정을 접착제로 뭉쳐져 ‘우리’가 되는 새로운 단수형이다. ‘나+정(혹은 의리)+나+정+나=우리’가 공식이다. 이렇게 불안정한 나를 ‘우리’ 안에 넣어서 소속감과 연대의식을 통한 심리적 사회적 그리고 심지어는 경제적인 안정을 찾는 것은 한국인 심리 특징 중에 하나이다.
일단 ‘우리’(we, cage) 안에 들어가면, 다음엔 관계의 접착제인 정과 의리를 더욱 돈독하게 하여 찰떡처럼 공고한 유대를 맺어간다. A가 B에게 준 상당한 금품이 무슨 청탁성이 아니라고 극구 변명하는 것이 더러는 진실로 들릴 때도 있다. 구차스럽게 뇌물을 바치지 않아도, 우리의 유대를 계속 공고히 하면 다 해결되는 일들이 많다.
공과 사를 구분하는 사회에는 공무원이나 공공기관원에게 주는 금품이 뇌물이지만, 공사가 희미하고, "우리냐 남이냐"로 구분되는 사회에선 우리끼리 오가는 돈, 정, 의리는 오히려 당연한 ‘우리 유지비’(영어로는 we-ness maintenance expense면 어떨까) 정도로 간주된다. 우리끼리는 남들에게나 적용되는 골치 아픈 규정, 법, 규율 등등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서로 알아서 도와주고 알아서 기면 되는 것이다. 이 우리주의는 학벌, 문벌, 지방색, 파당 등등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서 우리 밖의 남에게는 배타적이다.
’공적자금’의 공(public)보다는 우리(our)의 자금이라는 인식이 더 쉽고, 공직 혹은 기관장 임명에도 "남에게냐 우리에게냐"에 신경을 쓰다보니 지역편중 인사라는 말이 생긴다. 노사대립도 우리편이냐 남(적)이냐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해결이 힘들다. 집단이기주의도 실은 이 ‘우리주의’(we-ness)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새 정권-신당창당이란 공식도 ‘우리주의’의 심리현상에 근원이 있다. ‘우리’ 당 속에 있는 ‘남’들은 내쫓거나 우리끼리 모이는 신당을 만들어야 하는 강박이 있다.
실은 공당(公黨) 안에는 많은 다른 발상을 갖은 개개인이 있고, 이들도 국민들의 대표이니까 함께 일해야 하는데도, 이것이 어렵다. ‘공’보다도 ‘우리’가 앞서다보니 공당을 해체하고 ‘우리 당’을 창당하게 마련이다. 이 ‘우리 당’이 한 몇 년을 지나면서 자연히 비판세력도 생기며 제법 공당의 역할을 준비하면, 해체, 축당, 개명 등등의 과정을 거쳐가며 새 정권-신당을 재확인한다. 이제는 ‘우리와 남’ 가리기보다는 ‘공과 사’ 가리기에 초점을 맞추는 인식의 변화가 제도개혁이나 신당 창당보다도 더욱 절실하다. 이 ‘우리 남’의 인식이 둔화되면 법, 정의, 합리, 국익, 상생, 등등의 많은 새로운 가치관과 척도가 살아날 수 있게 된다.
정균희 UCLA 의대 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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