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토요일 4시간 동안 연설 연습을 했다. 일요일에도 최소한 그 정도는 연습했다. 교회에 갔다 와서 몇시간 휴식을 취한후 대통령은 곧 바로 백악관 극장으로 걸어가서 20여명 보좌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습을 했다. 바로 옆에는 두 대의 컴퓨터가 있어서 필요할 때마다 표현을 바꾸고, 내용을 자르고, 첨가했다. 화요일밤 집에서 시청할 국민들, 그리고 상하양원 의원들에게 어떻게 들릴 것인가에 보좌관들은 온 신경을 집중했다 … ”
지난 99년 국정연설을 앞두고 긴장한 빌 클린턴대통령의 모습이다. 연설의 귀재, 클린턴이 이렇게 긴장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하필 그 시기가 연방상원에서 탄핵청문회가 열리고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자신을 몰아내려는 ‘재판관들’앞에서 국정의 방향을 펼치고 지지를 얻어내야 하는 자리이니 클린턴으로서는 보통 어려운 자리가 아니다. 연방의원들도 입장이 애매하기는 마찬가지 였다. 탄핵을 고려 중이지만 아직은 엄연한 대통령이니 국정연설을 보이코트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박수갈채를 보낼 수도 없고 … 핑계만 있다면 참석을 안하고 싶었던 것이 당시 많은 의원들, 특히 공화당 의원들의 심정이었다.
클린턴 같은 특이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국정연설은 대통령들에게 대단히 긴장된 행사이다. 연방의원들만을 대상으로 한 연설의 차원을 벗어나 전국민과의 커뮤니케이션으로 국정연설의 성격이 굳어졌기 때문이다.
1790년 1월8일 조지 워싱턴대통령은 추운 겨울 아침 6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뉴욕의 페더럴 홀에 가서 첫 국정연설을 했다. 그 전해 4월 취임한 이후 국정의 흐름을 연방의원들에게 알리는 차원이었다. 대통령은 이따금씩 나라의 제반 상황을 연방의원들에게 알리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법제정을 추천하라는 헌법 제2조 3항의 내용에 근거한 행사였다.
단순히 국정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는 차원이어서 3대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부터는 연설을 없애고 편지로 대신했다. 100여년간 대통령이 연초 의회에 보내는 편지로 전통을 이어오던 것을 다시 국정 ‘연설’로 바꾼 것은 1913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었다.
이후 1923년 캘빈 쿨리지의 국정연설이 처음으로 래디오 전파를 타고, 1947년 해리 트루먼의 연설이 TV로 중계되기 시작하면서 국정연설은 전국민의 행사가 되었다. 대통령의 연설이 워싱턴 정가의 울타리를 벗어나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지면서 가장 강력한 정견 발표의 기회로 굳어졌다. 몬로 독트린, 뉴딜정책, 위대한 사회등 미국의 맥을 잡아온 대통령들의 핵심적 정책들이 국정연설을 통해 소개되었다.
국제적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조지 W. 부시대통령이 28일 국정연설을 했다. 그의 정책들이 전쟁과 경기침체로 인한 국내외의 우울한 기류를 빨리 걷어냈으면 한다.
<권정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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