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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영(서울경제 뉴욕특파원)
97년 가을,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의 민주당은 무역 자유화를 내용으로 하는 신속처리권(패스트트랙)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고, 다수당을 차지한 공화당은 이 법안의 골자인 대통령의 통상 대권에 반대했다.
그때 클린턴 대통령은 주식투자자들을 향해 “법안이 통과되면 주식시장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통령이 의회와 마찰을 빚으면 유권자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호소하는 것이 민주주의 관행이다. 대통령이 유권자의 지지를 얻어내면, 야당도 표를 의식해 정치적 판단을 바꾸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발달한 미국에서 대통령이 유권자에 호소하지 않고, 주식 투자자에게 호소한 것이다. 그 이유는 유권자의 절반 이상이 증권 투자자들이고, 그들에게는 주가가 올라가는 것만큼 반가운 소식이 없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주식 투자자를 겨냥해 지지를 호소하는 일은 것은 미국에서도 불과 얼마전부터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51%가 주식에 투자하고, 유권자의 53%가 주식투자자로 나타났다. 주식 투자자가 곧 유권자고, 경제적 이해 관계가 곧바로 유권자의 지지도로 연결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오는 19일로 예정된 한국 대선에서도 후보들이 증권투자 유권자를 겨냥한 공약과 주장이 눈에 띤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노무현 민주당 후보의 공약을 반박하면서, “행정수도를 충청도로 옮기면 수도권의 집값과 증시가 폭락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노 후보는 “종합주가 지수를 2,000 포인트까지 올리겠다”고 전제하며, 행정수도를 이전할 경우 수
도권 집값이 안정되고, 주식시장에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경제 논리로 보면 두 후보의 주장에 상당한 허점이 있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수도권에 비즈니스, 교육, 문화적 기능이 밀집해 있기 때문에 행정 기능이 빠져나간다고 해서 집값이 폭락할 것으로 보지 않고 있다.
70년대초에 서울대를 관악구로 옮기고, 청계천 전자상가를 도심밖으로 이전시켰지만, 그당시 걱정했던 서울 도심의 밀집도 해소는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국 사람 대다수는 부동산을 담보로 증권 투자를 하기보다 여유자금으로 투자를 하므로, 집값이 떨어지면 주가가 폭락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노 후보의 주가 2,000 포인트 목표도 믿기지 않는다. 한국 주가는 15년 이상 300~1,000 포인트의 큰 박스권을 움직였다. 노태우 대통령때도 주가 1,000 포인트를 넘었고,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때도 1,000 포인트를 넘었으나, 곧 무너졌다. 경제의 기초여건이 든든하고, 증시 기반이 개선되어야지 주가가 오르는 것이지, 대통령이 주가를 부양하겠다는 것은 넌센스다.
어쨌든 이번 한국 대선에서 처럼 증권투자자를 겨냥하는 정책 논쟁은 역대 선거에 없었던 새로운 경향이다. 한국에 증권투자자들이 늘어나고, 경제 이슈가 정치 이슈보다 중요한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 증권예탁원에 따르면 지난해말 주식 직접투자인구는 330만명으로, 총인구의 7%에 달한다. 뮤추얼펀드나 투자신탁회사에 돈을 맡긴 간접투자자까지 합치면 8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이 모두 20세 이상 유권자라고 가정할 때 총유권자 3,500만명의 25%에 이른다.
미국에 비해 그 비율이 절반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주택 소유자도 포함시켜 지지를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선거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스커드 미사일을 적재한 북한 선박이 중동 해역에서 미 해군에 억류됐다가 풀려나고, 북한이 핵동결을 해제하겠다고 선언하는등 이른바 ‘북풍’이 몰아치고 있다.
하지만 주목할 점은 한국과 미국의 언론들이 굵직하게 북한 문제를 헤드라인으로 뽑아내도 한국 증시는 크게 동요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증권시장의 잣대로 보면 이러한 이슈들이 해결로 가는 전제이지, 전쟁과 대결로 가는 방향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번 대선은 어느 후보가 증권투자자와 주택 소유자로 대변되는 중산층의 지지를 더 많이 얻느냐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도 큰 오류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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