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즈퍼레이트 꽃차 탑승 이민 100년의 영웅들
▶ 새미 리(의사 , 올림픽 2관왕)
동양인 피부가 낯설게만 느껴지던 1900년대 초반은 인종차별이란 말이 서슴없이 흘러나와도 흠이 되지 않던 시기였다. 그 시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왜소한 체구에 노란 피부의 동양인으로서 특히 한국인으로서 한민족의 우수성과 기상을 드높인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새미 리(82) 박사가 으뜸이다. 운동과 학업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던 그는 이민 100년을 빛낸 자랑스런 영웅임에 틀림이 없다.
그를 부를 때 항상 따라붙는 ‘닥터’라는 호칭과 미국내 동양인 최초의 올림픽 2관왕이라는 화려한 금자탑은 초기 이민자들이 미국내에 뿌렸던 피나는 노력의 결과이자 이민후세들에게 물려줄 이민사의 갚진 교훈이요, 롤 모델이다.
그는 하와이 사탕수수밭 이민 1세의 아들로 프레즈노에서 1920년 태어나 LA인근지역에서 자랐다.
고교 재학중 한때 학생회장에 출마했다가 학교 역사상 유색인종 학생회장은 없었다는 교감의 은근한 압력에 밀려 출마를 포기한 적도 있었다. 어린 시절 LA에서 열린 올림픽 경기장 앞에 휘날리던 만국기를 보며 부친에게 세계에서 제일 운동을 잘하는 선수가 되겠다고 다짐했던 그는 28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 10미터 플랫폼 다이빙에서 첫 금메달을 따냈다. 그로부터 4년후 헬싱키 올림픽에서도 또다시 같은 종목 금메달과 3미터 스프링보트 동메달을 따내며 일제 식민지와 동족 전쟁으로 찌들었던 한국인들의 어깨를 한껏 펴주기도 했다.
그는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따기 전 1947년 USC에서 의학박사를 받은 후 53~55년 주한 미군부대 병원에서 이비인후과 전문의로 근무했다.
’이민 100년사의 영웅’을 뽑았던 선정위원회 유의영 위원장도 "52년 서울운동장 수영장에서 늠름한 모습으로 다이빙 시범을 보여주던 닥터 리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며 "이 장면을 지켜본 많은 젊은 학생들의 가슴에 희망과 꿈이 용솟음쳤을 것"이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새미 리 박사는 현재 헌팅턴비치에서 부인과 함께 조용히 은퇴 후 생활을 즐기고 있다.
<김정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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