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참으로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을 할 때가 가끔 있다.
아프리카에서 태어나서 평생동안 신발 한번도 신어보지 못하고 살다가 죽어야 하는 사람들을 볼 때, 빼어난 미모와 착한 마음씨를 가진 친구가 별로 특별나게 보이지도 않는 바람둥이 남편으로부터 천대받으며 사는 것을 볼 때, 그런 마음이 든다.
지난 여름 아프리카에서 선교가 끝날 무렵 피그미 촌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정부 지정 거주지에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르완다의 원주민인 피그미족도 르완다정 부에서 지어준 집에서 여덟 가족이 함께 살고 있었다.
르완다 사람에게서조차 소외되어 천대받고 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처참하기가 말할 수가 없었다. 흙 속에서 먹고 자고 하는 생활로 그들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살고 있었다. 갈기갈기 닳아 헤어진 옷이나마 어른들만 입었고, 아이들은 거의가 벌거벗은 채였다. 어른이나 아이나 신발을 신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같은 지구상에서 같은 시대에 살면서 어쩌면 이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야만 할까.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말이다. 그동안 아프리카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지만, 이곳 피그미 촌의 사람들처럼 처참하게 살고있는 사람들은 처음 보았다. 르완다 인구의 1%가 피그족이라 하니 아마 10만 명도 넘는 피그미족들이 이렇게 살고 있다는 현실이다.
몇 달이 지난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들의 모습이 자주 떠오른다. 나의 뇌리에 사진처럼 박힌 한 여자의 모습은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가 없다. 참새같이 왜소하고 가냘프게 생긴 여자가 인파를 헤치고 나에게 다가와서 자기 품에 안긴 아기를 가리켰다.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은 갓난아이의 눈은 눈곱이 낀 채 감겨 있었다. 아기는 눈에 염증이 나서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젊은 엄마는 손짓 발짓으로 아기의 눈을 고쳐 달라고 애걸 하였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미의 마음은 나나 그 여자나 똑같을 텐데, 시력을 잃고 있는 자식을 보면서 의사에게 데려갈 수 없는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울까. 그녀를 껴안고 “장님을 고치신 주님, 이 아이의 눈을 뜨게 해주세요”하는 간절한 기도가 절로 나왔다. 이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장님으로 살아야 할 그 아이를 생각하니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마당 한가운데에 돌을 포개어 놓고 질그릇에 죽을 끓이고 있는 고생에 찌들은 여자들의 얼굴에는 번뇌의 골이 패였고 수심에 가득 찬 모습이었다. 대낮인데도 술에 취해 있는 남자들은 그래도 여자들보다 형편이 나은지 가끔 웃기도 하였다. 어린아이들은 영양실조에 걸려 생기를 잃은 채 나무 밑에 힘없이 누워 멀뚱멀뚱 우리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왜 이 사람들은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하루 한끼 먹을 양식도 없어 배를 움켜쥐고 살고 있는 이들을 볼 때 너무도 공평하지 못한 세상임을 한탄하게 된다.
우리가 누리고 사는 풍족한 생활이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여건이 좋은 나라에 태어난 덕택이 아닌가. 지난 여름 피그미 촌 방문은 불공평한 세상을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만드는 의무와 책임이 많이 받은 우리들에게 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여 주는 기회 였다.
김현덕 샌프란시스코 주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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