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에서 친정 어머니가 오셨다. 지난 20년 동안 딸네 집에 서너 차례 다녀가셨는데, 이번에 오셔서는 ‘미국 사람’을 ‘미국놈들’이라 부르셔서 나를 놀라게 했다. 그런가 하면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에 대량 살상무기의 해체를 요구하면서 “단독 응징도 불사하겠다”고 경고했다는 보도를 들으고는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며 단호하게 이라크 편을 드셨다. 한국에서 미국의 위상이 달라지고 있음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미국 오실 때마다 좋아하시는 것도 있다. 우선 깨끗한 공기와 넓은 대지에 대해서는 찬탄을 연발하신다. 특히 밤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이나 반짝이는 반딧불을 보시면 “한국에는 이런 것들이 사라진지 오래”라며 소녀처럼 좋아하신다. 바로 코앞인 거리도 자동차를 간다거나, 은행 업무나 약 픽업 같은 일들이 드라이브 인으로 해결되는 것을 보시면 “미국 생활이 참 편구나”라고 하신다.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시면 나는 웃으며 동조하지만 속으로 혼자 하는 대답이 있다.
“맞아요, 미국 생활이 참 편하고 쾌적하지요. 하지만 미국에 매력을 느꼈던 이유가 그게 다는 아니었어요. 이 사회, 이 땅이 갖고 있는 보이지 않는 미덕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미덕이 이제 뿌리째 흔들리고 있어요.”
지금까지 미국이 이상국가나 지상 천국이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멀리는 인디언 학살에서부터 노예제도,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제국주의적 수탈, 인종차별 등 미국도 어두운 역사의 이면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 계속 이민자들이 몰려들었던 것은 개인의 자유가 존중되고,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사회가 운영된다는 신뢰 때문이었을 것이다.
10년 전쯤 되었을까, 성조기를 태우는 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 조항에 위배된다는 판결이 연방 법원에서 나왔었다. 나는 당시 위헌 판정 소식을 들으며 참 살맛 나는 사회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 판결로 성조기를 태우는 사람이 늘어나기보다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미국 사회에 애정과 신뢰를 느끼게 되는 사람이 더 많아질 것이라 믿었었다.
하지만 9.11 이후 미국은 변하고 있다. 건국이래 최초로 본토가 공격을 당하고, 3,000명 이상의 무고한 인명이 희생되었으니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어떤 방향으로 변하느냐 하는 것이다. 모기떼가 들끓으면 웅덩이를 제거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다. 왜 그러한 비극이 일어났는지, 미국의 대외 정책에 대한 깊고도 겸허한 성찰 없이 이를 이민자들에 대한 규제 강화로 연결시키는 발상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주소이전 신고를 마쳤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컴퓨터에서 양식을 다운로드받아 주소지를 기입하는 절차가 아니다.
“이민국이 날 건드리면 난 ACLU(미시민자유연맹)로 달려갈 것”이라고 호기로운 농담을 던지지만, 이민자나 외국인에 대한 감시의 눈초리가 번뜩이는 미국은 더 이상 내게 살맛 나는 세상이 아니다. 그야말로 ‘미국놈들의 세상’이 되어 그런 것일까, 사회의 진보와 역사 발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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