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를 경악시킨 9.11 테러가 일어난 지 1년. 참사 현장인 ‘그라운드 제로’는 또 하루의 아침을 맞고 있었다.
오전 7시. 새벽 안개를 헤치고 나온 햇살이 8층 깊이의 거대한 웅덩이로 변해버린 그라운드 제로를 비추기 시작하자 야간 작업용 조명은 어느새 빛을 잃어갔다.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거리는 다소 한산했지만 지하철과 버스, 뉴저지발 페리를 배를 타고 온 통근자들이 속속 사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근처에서 만난 직장인들에게 기자라며 녹음기를 대자 ‘노 코멘트’로 일관했다. 1년 전 너무도 끔찍했던 테러 현장에서 살아남았다는 ‘천운’을 기뻐하기보다는 ‘악몽’을 다시는 되새기지 않고 싶다는 반응들이다.
테러 이전 월드트레이드센터와 월스트릿 등 로어 맨하탄을 찾아온 관광객들로 항상 붐비던 처치 스트릿과 리버티 스트릿 사거리의 버거킹 5층 건물은 상처투성이의 외벽과 함께 출입구가 폐쇄돼 있다. 누군가가 스프레이로 뿌려 쓴 ‘NYPD’라는 글자만이 눈에 확 들어왔다.
리버티 스트릿을 따라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잇대어 있는 20층, 40층 규모의 6개 건물이 모두 심한 부상을 치료하지 못하고 흉물스레 늘어서 있다. 도이치방크가 사용하던 41층의 130리버티 건물은 한쪽이 크게 부서져 검은색 포장을 씌웠고 겉에는 대형 성조기와 함께 ‘우리는 당신을 잊지 않겠다(We Will Never Forget You)’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반대편에는 이동통신회사 버라이존이 입주해 있는 40층 규모의 140웨스트 빌딩 경우 건물 철골 구조가 앙상하게 드러낸 채 서있어 1년 전의 공포를 되살리게 했다.
테러를 겪으면서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공포’와 ‘비극’은 동쪽 처치스트릿 건너에 위치한 세인트 폴 채플에 다양한 형태로 표현됐다. 교회를 둘러싼 울타리에는 비탄과 애통, 분노, 기원 등이 담긴 모자, 티셔츠, 인형, 종이학, 깃발, 마스코트 등이 수 없이 걸려있다.
마침 젊은 학생이 매직펜으로 러시아 깃발에 ‘9.11을 잊지 않겠다(We’ll Never Forget 9-11)’고 쓰
고 있었다. 모스크바 시립대 물리학과 4학년이라는 막스 포멘코씨는 "이번 테러는 미국만의 아픔이 아니다"며 "전세계가 합심해 이번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그라운드 제로’는 도심 재개발 현장처럼 오히려 활기차 보였다. 잔해물 제거는 끝났지만 1주기 추모식을 앞두고 대형 포크레인과 불도저, 레미콘 차량이 여기저기서 으르렁거리며 막바지 준비에 분주했다. 현장 관계자 조엘 로메로씨는 "1주기 행사 준비 때문에 야간에도 조명을 켜놓고 주변 정리 작업을 서두르고 있다"며 "이곳에 대한 재개발 계획이 확정되면 본격적인 공사가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110층 짜리 건물 2개 동이 붕괴하면서 덮친 잔해물로 상처가 심했던 월드파이낸셜센터는 외벽 수리를 모두 끝내고 이제 웨스트 스트릿을 따라 인도 복구 작업이 한창이다. 천장 유리가 박살났던 명물 윈터가든도 수리를 마쳤다. 인접한 노스 코브 마리나에는 성조기를 단 요트들이 다시 빼곡이 들어찼다. 테러 직후 공동화 현상을 보였던 배터리팍에는 사람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당신이 그라운드 제로를 바라보고 있을 때(When you see Ground Zero)/ 나도 당신의 눈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In your eyes, I will see it, too)/ 그리고 이 짓을 저지른 사람들을(And for the people who did this to us)/ 증오하지 마세요(Please do not hate)/ 당신은 그들보다 더 나은 미래가 있습니다(Because you would be in better than them)/ 미국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 나갈 것입니다(America will decide their fate).’ 현장 북쪽의 팍플레이스에 세워진 조그만 추모 제단에는 15세의 제시카 마틴이라는 소녀가 지은 시가 이렇게 붙어 있다.
그라운드 제로는 소녀 마틴의 시처럼 뉴욕과 미국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나갈 수 있음을 웅변하고 있는 듯 했다. <장래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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