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의 활동과 사상에서 일관되게 추구하고 있는 것은 힘이었다. 한말 봉건사회를 개혁하는 것도 힘이요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여 독립국가를 이룩하는 것도 힘이었다. 그가 이 힘을 발견한 것은 오랜 사고와 경험을 통해서였다. 한말 일제 하를 살아온 도산은 반봉건·반침략의 민족운동을 하려고 해도 무엇보다 건전한 힘을 배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 힘은 “거짓말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정직의 힘과 무실역행에서도 보여주는 성실과 근면의 힘, 언어와 행동거지에서 보이는 신독(愼獨)과 절제의 힘 등이 어울려 이룩되었고 또 그것들로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그의 사상과 행동에서 보이는 절제상(節制相)은 유머와 부드러움을 동반한 근엄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는 이 힘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을 움직여 좁게는 공동체운동을, 넓게는 민족운동·국권회복운동을 추진하는 밑바탕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면 그의 이러한 힘의 배경이 되는 사상의 근원은 어디에 있었는가. 여러 가지를 거론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기독교의 성경과 신앙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가 18세의 나이로 서울에 올라와서 선교사들을 통해 구세학당에서 처음 만나게 된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일생을 이렇게 이끌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도산은 소년시절 예수를 믿고 난 뒤에 열심으로 전도했고 여러 교회를 세우고 점진학교라는 학교를 세우고 친히 설교를 했다. 도산은 기독교를 의의 종교라면서 그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도산은 ‘우리 2,000만 동포가 모두 손에 신약전서를 한 권씩을 가지는 날에는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외쳤는가 하면 기도하는 사람이기고도 했다. 그는 또한 나라를 위하여 밤을 밝히면서 근심하고 회개하면서 희망을 가졌다. 따라서 도산은 전형적인 종교가는 아니지만 진정한 종교가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산을 철저히 자기부정·자기희생의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던 것이다.
도산은 기독교의 진리와 사상을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게 하지 않고 사회적이고 민족적인 이념으로 승화시켜 나갔다. 그리고 그가 기독교의 핵심으로 보았던 회개와 사랑을 사회적인 에너지로 활용하려고 했다. 회개를 인격혁명과 개조운동의 방편으로 등식화시켰고 사랑을 정의돈수로 활용함으로 종교적인 가치를 사회적인 이념으로 만들어 갔던 것이다.
도산은 담배를 피우는 등 외형적으로는 신자가 아닌 듯했지만 내면적으로는 누구보다 앞선 기독교 신자였다. 그는 선교사들이 가져다 준 정교분리의 신앙이나 민족이 빠진 신학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의 신앙은 당시의 민족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려 했고 민족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그 앞에서 해결점을 찾으려 했던 신앙이다. 그는 민족문제를 추구하는 신앙인인 한편 의와 사랑의 보편적인 가치를 갈구했던 기독교인이었다.
도산을 이렇게 평가하게 될 때 우리는 한국 기독교사에 흐르는 또 하나의 신앙맥락을 발견하게 된다. 기독교를 종교의 범주 속에 가둬두지 않고 사회 속에 끄집어내어 사회적 에너지로 활용하려는 일단의 신앙적 맥락이라고 할 것이다. 도산 안창호를 비롯하여 남강 이승훈·고당 조만식 일가·김용기·장기려 등으로 맥락 지어지는 기독교 사회운동 맥락이라고 할 것이다. 그 출발점에 도산 안창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만열/숙명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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