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로 집에서 며칠 쉬다보니 아침저녁으로 해와 달의 느낌이 달라지고 바람과 기온의 감도가 차이나는 것이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체득할 수 있었다.
차를 타고 가다보면 어디서나 마주치는 묘지도 다른 때보다는 시간 여유를 갖고 깊은 시선으로 볼 수 있었다. 키세나 파크 옆, 퀸즈 블러바드 선상 등 어느 묘소나 화사한 꽃들이 놓여져 산 자가 죽은 자를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래 전, 뉴욕의 한 아빠로부터 태아 장례식 이야기를 들었다.
둘째 아기를 가진 아내가 임신 5개월 째 병원에 갔더니 담당의사가 태아가 염색체 이상으로 태어나도 살 수 없으므로 하루 빨리 수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컨 오피니언도 마찬가지라 다음 아이를 가지려면 유도 분만하여 아기를 출산시키자는 의사 말대로 수술을 했다.
세상 밖으로 나온, 양수에 쌓여 눈감은 아기의 온몸이 핑크 빛으로 빛나는 것이 너무 예뻤다. 아내는 몇 번이나 거절하다가 남편이 “아기가 너무 예쁘다. 한 번 보아라”고 권하자 용기를 내어 보고 나더니 아내 역시 “너무 예쁘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장의사로 전화 해 “아기의 장례식을 치뤄달라.”고 주문, 가족들만 모여 기도하며 어른과 똑같이 3일장을 지냈다는 것.
장례사 말이 특별히 입히고 싶은 옷이 있으면 갖고 오라고 하여 그는 몸이 채 회복되지 않은 아내와 백화점에 가서 웬지 그 아기가 딸일 것만 같아 어른 손바닥만한 사이즈의 드레스를 고르고 예쁜 여자아이 이름을 지어 주었다.
바구니처럼 자그마한 관에 담긴 아기는 가족 사진, 위의 아이가 동생에게 주는 장난감, 아빠가 아이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성인과 똑같은 절차를 거쳐 롱아일랜드 한 공동묘지에 묻
혔다.
옆자리 아기는 4개월 짜리. 주위에 50기 정도의 그런 아기들이 묻혀 있는데 모두 태어나고
죽은 날짜가 없이 그냥 병원에서 죽어 나온 날짜와 이름만 새겨져 있다는 것.
그 아기들은 그렇게 떠났어도 남은 가족에게는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저 조금 먼저 레떼 강을 건너간 가족인 것이다. 이 부모를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사실 생명이 잉태된 순간부터 한 생명이 아닌가.
20년 전, 일본 출장을 갔다가 어느 절에서 본 광경을 잊을 수가 없다.
향을 얼마나 피웠는지 눈도 제대로 못 뜰 정도로 연기가 자욱한데 절 입구에 서 있는 눈도 코도 머리도 동글동글한 까만 돌로 된 동자상 십여 개의 목에 저마다 빨간 머플러가 둘러져 있었다.
안내자는 태어나지 못한 채 엄마의 뱃속에서 스러져간 불쌍한 태아의 영혼을 달래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자 임신, 출산에 의해 여성의 몸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짐작도 못하던 20대 미혼의 나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이 내가 위로 받은 기분이었다.
뚝딱 뚝딱 쉽게 아기를 낳는 임신 체질 여성도 있지만 여러 번 잘 못된 후에야 겨우 아기를 낳는 여성들도 많다. 임산부의 건강이나 가정 형편이 안 좋아서 도저히 임신 상태를 유지하지 못한 경우, 사는 것이 바쁘다보니 곧 잊겠지만 그래도 고만 고만한 나이의 아이가 지나가면 ‘살아있다면 지
금쯤 저만 하겠다’ 싶어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기도 할 것이다.
한인여성들은 대개 임신 후반기까지, 때로는 출산 전날까지도 일을 한다. 아기를 무사히 낳기도 하지만 과로와 임신중독으로 인해 잘못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여성이기에 출산이나 유산의 고통을 잊고 또 아기를 갖고 싶어진다.
가을이 성큼 다가와서 그런가? 왜 자꾸 작고 불안정하고 가여운 존재들에게 눈길이 가는지.그 아빠가 태어나지 못한 아기에게 무어라고 편지에 썼는지 차마 못 물어보았는데,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못 물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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