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를 지난 계절은 본격적으로 여름에 진입하고 있다. 어느 배우는 자가(學人) 무더운 여름날 그 스승에게 물었다. 선승께서는 더위를 어떻게 피하십니까 하니 대답하시되 나는 더위가 오면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간다고 하였다. 더위 그 자체를 피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더워하는 그 마음을 없이하여 더위를 상대한다는 뜻일 것이다.
무척 시적이고 그럴듯한 말씀이기는 하지만 건강하지는 못하다. 그래 가지고서야 어찌 장군죽비로 한번 맞는 것을 면할 수 있으랴. 삶은 또한 그렇게 심리요법으로 치유할 대상은 더욱 아니다.
더운 날의 우리는 더워서 미칠 지경이다. 더운 염천에는 부처님도 더워서 죽을 지경이다. 이것이 더운 날의 진실이다. 이 진실에 正面하여 우리는 한없는 열기를 쏟아내고 구슬 땀을 흘리면서 우리 삶의 몫을 다할 따름이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은 한가지 상태로 고정 불변하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무엇이든지 언젠가는 변하고 바뀐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해가 지고 나면 서늘해 질 것을 알고 믿으며, 찬물로 땀을 씻고 나면 얼마나 전신이 상쾌무비하다는 것을 알고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변화에 대한 믿음이 확실하기 때문에 어떤 삶의 현실도 정면할 수가 있는 것이다. 변화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이다. 변화에 대한 믿음은 우리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구원은 변화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며 변화는 무쌍하기 때문에 구원도 또한 무쌍한 것이다. 변화는 계속되는 것이고 우리의 구원도 계속하여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
사상으로 이룩하는 것이 구원이 아니다. 고로 소위 구원사상이란 하나의 관념이며 정제된 알약에 불과한 것이다. 변화하는 생명현상에 일관된 구원이란게 도대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알약 하나 먹으면 평생 배부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구원에는 기득관도 없고 선점권도 없고 독점권도 없으며 유일하지도 않다. 변화는 무쌍하고 수많은 구원도 거기에 짝한다. 죽음도 삶의 변화에 불과하다. 구원은 이 삶에도 있고 저 죽음에도 있는 것이며 어떤 변화에도 있는 것이다.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있어 온 것이며 지금 있는 것이다. 구원이 어찌 죽음 다음 저 멀고 높은 곳에서만 이루어진다고 하는가.
변화가 무쌍한 중에서도 가장 극심한 변화는 우리의 생각이니 일찰라간에도 구백번을 생멸한다는 것 아닌가. 이 대단한 변화를 구원으로 엮어내는 것을 번쩍이는 지혜라고 한다. 이 대단한 변화는 우리 몸에 원래로 갖추어 있는 것이요, 구원을 엮어내는 번쩍이는 지혜도 태어날 때 같이 가지고 나온 물건인 것이다. 처음부터 변화신이요, 처음부터 구원되어 있는 것이다. 변화가 있는 곳에는 구원도 있다. 변화가 멈춘 곳에는 구원도 멈추어 버린다.
그런데 요사이는 참 이상한 일들을 많이 한다. 마음을 연습하는 것을 가지고 무슨 대단한 구원이나 되는 듯이 떠벌이고 연습하는 것을 보면 꼴불견이다. 어떤 것이 마음인 것인가를 언어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표현한다해도 이해하기도 역시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마음을 안다. 어떤 단어를 만들어 보면 이것이 정신 쪽인가 마음 쪽인가를 대충 알게 된다.
애국정신은 있어도 애국마음은 좀 이상하다. 주체정신, 주체마음은 또 어떤가. 자본주의 정신하고 자본주의 마음은 어떤가. 새마을 정신인가 새마을 마음인가, 통일정신인가 남북통일 마음인가, 불교정신인가 불교마음인가.
여기서 우리가 어렴풋이 느끼듯이 정신은 연습하고 공부해야 하는 것이지만 마음은 공부하고 연습하는 것이 아님을 느낄 것이다. 머리를 공부하고 연습하여 얻은 습관을 우리는 정신이라고 한다. 무엇이던지 반복해서 연습하면 힘이 생긴다. 반복되는 연습을 통해서 우리는 장인이 되고 기술자가 되고 프로가 되고 달인도 되며 입신의 경지가 되기도 한다.
머리를 연습하고 공부하여 얻은 정신의 힘(정신력)은 대단한 것이다. 우리가 다 이것으로 살고 정신을 찬양하고 따른다. 그러나 손끝을 연습하고 발끝을 훈련시키고 머리를 가르친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구원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정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그 정신을 공부하고 연습해야 하는 것이지만 부처님 마음(우리의 마음)은 공부하고 연습할 대상이 아니다. 행복도 연구하고 연습한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행복은 마음의 어떤 상태이기 때문이다. 불행을 느끼지 않으면 될 것을 행복하다고 행복하다고 떠벌이며 행복을 연습하는 사람을 보면 희극배우처럼 보인다.
이것에도 감사하고 저것도 감사하며 범사에 감사한다고 열장의 종이에도 다 받아 적을 수 없는 감사를 주절거리는 사람을 보면 참 딱하다. 이런 것들은 다 정신과 마음을 혼동하거나 알지 못해서 하는 일이며 마음을 연습하여 길들이면 결국 자기 기만과 위선과 자기도취의 병만 깊어감을 어찌하리요.
번쩍이는 지혜로써 본래로 구원되어 있는 이 마음을 드날릴 지어다. 일어나고 꺼지는 생멸무쌍한 이 마음에 구원이 가득 담겨 있음을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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