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미국에 처음 도착해서 여장을 푼 곳이 시카고 한인타운인 로렌스 거리였다. 당시 미국에 대한 나의 소감은 미국이 전혀 미국 같지 않다는 의아함과 실망감이었다. 거리에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미국 사람들 대신 한국 사람들과 히스패닉들이 대부분이었고, 건물이나 주위 환경도 상상했던 것처럼 근사하지 않았다.
그 후 세월이 지나면서 미국은 무수한 스펙트럼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결코 벽안의 금발만이 미국을 대표하는 얼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만, 아직도 내게 미국은 미완성의 퍼즐로 남아있다. 어느 사회에나 있게 마련인 계층간의 갈등에 더하여, 짧은 역사 속에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어울려 살면서 빚어내는 갈등과 충돌, 그리고 이를 제어하고 완화하기 위한 갖가지 제도와 사회적 장치 등 미국이라는 나라는 살면 살수록 양파껍질처럼 또 다른 면이 드러난다.
얼마 전, 평소 선망하던 캘리포니아를 다녀왔다. 내가 살고 있는 중서부 지역은 옥수수 밭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평원지대로 전체적으로 밋밋하고 정체된 느낌을 주는 데 비해 캘리포니아는 젊고 역동적이라서 좋아한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동부 지역도 매력이 있지만 나 같은 이민자의 눈에는 바로 그 역사와 전통이 은근히 배타적인 느낌으로 와 닿아 별로 친근감이 가지 않는다.
캘리포니아에서 UC 버클리와 스탠포드 대학교를 가보았다. 학교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람이 바쁜 일정 중에 굳이 두 학교를 찾아간 것은 이들 두 학교가 오늘날 미국을 이끌어 가는 커다란 두 흐름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고, 수박 겉 핥기라도 그러한 분위기를 직접 느껴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한 때 히피문화와 반전운동의 중심지였던 UC 버클리 캠퍼스는 마침 봄방학을 맞아 비교적 한가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정 앞의 텔레그라프 길은 알록달록한 노점상들로 활기를 띠고 있었고, 심심찮게 노숙자들도 눈에 들어왔다.
혹시 부시 대통령의 테러 전쟁을 규탄하는 피켓 시위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던 나의 기대는 오사마 빈 라덴이 아닌 오사마 빈 부시를 현상 수배한다는 벽보에 만족해야 했지만, 노점상과 노숙자가 어우러진 학교 앞 분위기는 버클리가 앞으로도 사회적 약자들을 외면하지 않는 행동하는 지식인을 키워낼 것 같은 희망을 갖게 만들었다.
이에 비해 스탠포드 캠퍼스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한 마디로 별천지에 온 듯한 느낌이랄까. 백만장자였던 리랜드 스탠포드와 제인 스탠포드가 15세에 사망한 외아들을 추모하여 건립한 이 학교는 그야말로 미국 부자의 위력을 실감케 하는 아름답고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귀족의 성채처럼 조용하고 유유자적한 캠퍼스 안팎을 돌아다니다 보니 스탠포드 출신들이 공화당 싱크탱크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도,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원장을 비롯해 연방대법원 9명의 판사 중 보수적 색채를 지닌 4명이 이 학교 출신이라는 것도 고개가 끄떡여졌다.
어느 쪽이 더 좋고 나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두 학교가 모든 면에서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지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는 훨씬 더 복잡한 변수가 많다. 다만 개인이나 집단들이 분명한 제 빛깔을 지니면서도 견제와 조화를 이루어 나가고 있는 미국이란 사회에 대하여 말하고 싶은 것이다. 미국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이 생각보다 시시하다는 것이었다면, 20년 후 그 소감은 그 저력이 대단하다는 것으로 바뀌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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