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파원 코너]
▶ 김인영 (서울경제뉴욕특파원)
에너지 그룹 엔론 파산의 파장이 미국을 휩쓸고 있다.
의회에서는 10군데 이상 청문회가 열려 엔론의 전직 간부를 불러내 회계 조작사건을 조사하고, 회계 감사회사인 아서 앤더슨의 간부들도 회계감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이유를 추궁당하고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절친한 사이로 알려진 케네스 레이 전회장은 헌법상 권리라는 이유로 묵비권을 행사했지만, 한 여성 임원은 회계 조작이 사내에 오래전부터 알려졌던 사실이라고 증언, 충격을 주고 있다.
의회가 부시 행정부의 에너지 규제완화정책과 엔론의 로비활동 사이의 연관성을 따지기 위해 에너지 위원회 내용을 공개하라고 요구하자, 딕 체니 부통령은 법정에 가더라도 공개할 수 없다고 맞서 사건은 정치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엔론 파산이 가져온 가장 큰 걱정은 기업과 회계감사회사, 증권회사, 은행, 신용평가기관 등 미국 신용경제의 주축을 이루는 그룹들이 집단으로 불신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신뢰의 위기(Confidence Crisis)’가 확산되고 있고, 이는 회복의 징조를 보이고 있는 미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엔론 주가는 지난해 초 잘나갈 때 주당 90달러까지 치솟았지만, 회계조작 사건이 터지면서 급락, 지난해말 1달러 이하의 휴지조각으로 변해버렸다. 스톡옵션으로 자사 주식을 배당받았던 엔론 직원은 물론 401(k) 연금 포트폴리오로 엔론 주식을 샀던 투자자들도 하루아침에 거액의 재산을 날렸다.
분식회계에 대한 우려는 엔론에 그치지 않고 있다. 미국 회계법인의 양심이라고 자처하던 앤더슨마저 회계조작에 가담, 서류를 파괴하는 일이 벌어졌으니, 투자자들은 믿을데가 없어진 셈이다. 조금만 회계에 이상이 있다고 의심이 제기되고 있는 회사의 주식은 곧바로 투매 대상이 되는 현상이 열병처럼 번지고 있다.
제너럴 일렉트릭(GE)과 IBM, 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의 간판 기업은 물론 타이코 인터내셔널, 센던트, PNC 파이낸셜 서비스, 퀘스트 등 한때 우량종목으로 인기를 끌던 기업들이 줄줄이 분식 회계를 했다는 의심이 제기되고, 주가가 하락하고 있다.
외국회사도 안전지대는 아니다. 아일랜드의 엘란이라는 제약회사도 회계 조작 루머에 휘말려 뉴욕 증시에 상장돼 있는 DR(예탁증서) 가격이 폭락했다.
미국인들 가운데 주식투자를 하는 사람은 지난 90년대에 급증, 현재 1억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들은 노후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봉급의 일부를 꼬박꼬박 주식시장에 부어넣었고, 주식투자 대중화로 조성된 수조달러의 자금이 지난 10년간의 뉴욕증시 상승을 이끌었다.
그런데 문제는 엔론 사건으로 인해 90년대 주가 상승을 이끌었던 월가가 미국인의 절반에 해당하는 투자자 군단으로부터 심한 불신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 최대은행인 시티그룹과 체이스 맨하탄은행, 최대 증권사인 메릴린치도 엔론에 돈을 빌려준 경위를 의회에 나가 해명해야 할 형편이다. 신용등급이라는 무기로 아시아나 중남미의 한 국가 경제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던 무디스나 S&P 등 신용평가회사도 엔론의 투자등급을 제때 조정하지 못한 이유로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난해 11월 엔론이 파산보호를 신청했는데도 월가의 애널리스트 11명 가운데 8명이 엔론 주식을 추천하고 있었으니, 누가 애널리스트를 믿겠는가.
역사 흐름을 좇아 뉴욕 증시를 연구하는 경제학자들은 현재의 주가가 거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S&P500 지수를 구성하는 블루칩의 현재 주가수익률(PER)은 10년 전에 비해 3배 이상 높고, 1929년 대공황 발생직전보다 2배 가까이 높은 수준이다.
엔론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월가의 신뢰가 무너질 경우 뉴욕증시의 거품이 꺼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지난해 9월 테러 공격으로 잿더미가 됐을 때 애국심으로 무장한 자신감으로 일어섰던 뉴욕 월가는 이제 내부의 투자자들에 의해 불신받는 홍역을 앓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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