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에서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서울을 점령하자 난데없는 인공기의 물결이 거리를 휩쓸었다.
인공기를 들고 나온 사람들 중에는 지하에 잠복해 있던 공산당원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공산치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민군 환영을 나선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하여 평양에 들어가자 어디서 나왔는지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든 인파가 거리에 쏟아져 나오는 대조적 현상이 나타났다.
비슷한 사례로 수복지구의 주민들이 뒤쳐져서 쫓겨가던 인민군 패잔병들을 국군으로 오인하여 태극기를 흔들다가 학살당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또 인민군 복장으로 접전지역을 정찰하던 국군정보대원들이 자신들을 인민군으로 잘못 보고 크게 환영한 공산당원 주민들을 색출하여 처단한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최근 십수년만에 한국을 다녀왔다는 한 교포는 그간 한국의 물정이 엄청나게 변화했는데 특히 북한과 미국에 대한 인식이 정반대로 변화한데 크게 놀랐다고 했다. 사람들과의 대화 중에서 북한은 한국과 가까운 사이이며 미국을 마치 적국처럼 생각하는 것을 은연중에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러나 DJ 정부가 들어선 후 남북정상회담을 하면서 모든 정책이 북한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방향으로 기틀을 잡자 사회의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지식인들이 앞을 다투어 친북발언을 하고 언론이 이에 가세했다.
미국과 북한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요즘 한국 TV를 보면 부시의 북한관을 비판하는 외국인들을 인용하기에 바쁘다. 이렇게 되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어정쩡한 사람들은 모두 친북 반미로 기울어지기 십상이다.
DJ 정부의 대북관은 남북한이 동일민족이라는 동질감을 바탕으로 화해와 협력, 그리고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다. 흔히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말하듯이 한 핏줄이란 다른 어떤 관계 보다도 가까운 관계이다.
그러나 형제간에도 원수 사이가 될 수 있고 이웃사촌이란 말처럼 남남끼리도 형제처럼 가까운 사이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인간세상이다. 만약 민족주의를 금과옥조로 삼는다면 오늘날 세계의 양대국인 미국과 중국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DJ 정부의 대북 접근이 동족이라는 점 이외에 북한의 실체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한반도의 주변 정세에 대한 전망을 토대로 참을성 있게 추진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사랑의 감정에 빠져 상대방의 허물이나 주변사정을 아랑곳하지 않던 사람은 환상이 깨지면서 현실을 바로 보게 되면 당혹감을 겪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벽에 부딛힌 햇볕정책이 이와 비슷한 경우라고나 할까.
사람이 남과 대비되는 나를 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정체성이다. 나는 나이지 결코 남과 같을 수는 없다. 그리고 남과 협상을 할 때는 나의 입장과 목표가 뚜렷이 있고 이 목표를 최대한 달성하기 위하여 남을 설득하기 위한 대화를 한다.
국가간의 거래는 더욱 그렇다. 남북대화에서 남한의 정체성과 목표가 확고하지 않다면 그 대화는 언젠가는 깨어질 환상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현실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 남북관계와 대미관계가 모두 그렇다. 북한이 뭔지도 모르면서 동족 감정만 내세우지 말고 반미를 민족주의로 착각해서도 안된다.
현실을 바로 보고 그 현실에 맞는 확고한 나의 길을 찾는 것이 현명한 처사이다. 인공기를 흔들다가 또 다시 사태가 바뀌어 태극기를 흔드는 줏대 없는 민족의 역사를 되풀이하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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