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일때 떠나간 평양아버지 8.15방문단에
▶ 홀어머니 밑에서 온갖고생 자수성가
"50년동안 가슴 깊은 곳에 쌓여왔던 상처가 이번 만남을 통해 치유되기를 바랄뿐입니다"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남북한에서 가족의 생사확인 작업이 진행중인 가운데 미주 한인사회에서는 처음으로 16일 북한에 있는 있는 아버지 신용대씨(81)가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신문재씨(노스리지·50)는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이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면서 "반세기의 한을 어떻게 한두마디로 표현할 수 있겠느냐"며 말문을 열었다.
신씨가 아버지와 헤어진 것은 생후 백일 남짓했던 1950년 여름께로 한국전쟁이 발발 직후여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단지 어머니 이숙인씨(73년 1월 작고)로부터 아버지가 음악교사이자 성악가로 활동했으며 49년 두분이 명성여중 재직시 만나 결혼했고 매우 자상한 성격을 가진 분이라고 들은 것이 전부였다. 신씨는 아버지 신용대씨가 평양에 있는 음악대학 교수를 지낸 것으로 들었다고 말했다.
전쟁으로 뜻하지 않은 이별의 아픔을 겪은 신씨의 어머니는 교단을 떠나 가내봉제업을 시작했고 이때부터 신씨는 홀로 아들 뒷바라지에 매달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보다는 원망이 깊어졌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좋은 환경속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밀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는 신씨는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좋은 말씀만 하시며 강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셨지만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느낌이 자주 드는 것을 어쩔 수는 없었다"고 회고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병상에서 "조금만 더 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고 전한 신씨는 아마도 그 속뜻에는 당신이 떠나면 세상에 혼자 남게 될 아들에 대한 걱정과 함께 이별후 한시도 잊지 못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이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평양방문이 확정되면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나갈 계획이라고 밝힌 신씨는 "무엇을 준비해 가야 할지 모르겠다"며 "이산가족의 안타까운 사연들이 쏟아져 나올때마다 이런 비극이 두 번다시 없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신씨는 또 아버지를 포함해 모든 이산가족이 결국은 역사의 희생자들이라고 규정하면서 이번 일을 기회로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작은 소망도 피력했다.
50년의 세월을 ‘외로움의 시간’이라고 표현한 신씨는 어린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겪어야 했던 험난한 과정 때문에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간직하고 살아왔지만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아버지와의 상봉을 통해 모두 아물게 되는 기회가 되기를 기원했다.
신씨는 어려움속에서도 경기중·고등학교를 졸업, 현재 전자부품업체인 플렉스 링크사 부사장으로 있으며 부인 신영숙(49)씨, 딸 애리(24)씨, 아들 강민(22)씨를 두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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